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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이바라기 노리코의「내가 제일 예뻤을 때 」

by 장돌뱅이. 2020. 4. 5.


*월간지 『동광』’ 19321월호에 최영숙이 귀국 감상을 적은 글, 대중의 단결(출처: 신동아).


1926년 9월 스물 한 살의 조선 여성 최영숙이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나타났다. 스웨덴에 유학 온 첫 동양인이었다.
그가 지닌 것은
사회주의 관련 서적 몇 권과 큼지막한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스웨덴에는 아는 사람 한 명 없었고 스웨덴어는 간단한 인사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1906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최영숙은 1923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떠났다. 난징(南京)에서 명덕여학교에 들어가 중국어를 배운 지 
단 몇 달 만에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최영숙의 어학능력은 탁월했다. 이듬해 편입한 회문여학교에서도 
영어,
독일어는 물론 성악과 피아노까지 단연 돋보이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회문여학교 재학시절 최영숙은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공부하는 틈틈이 중국에 망명 중이던 여러 인사와도 교유를 나누었디
그 중의 한 사람인 도산
안창호는 총명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한 최영숙을 남달리 아꼈다고 한다.

회문여학교를 졸업한 최영숙은 스웨덴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에 유명한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였던 엘렌 케이
(Ellen Key·1849~1926)의 나라가 스웨덴이었기 때문이다. 
최영숙은 난징을 떠난 지 두 달, 천신만고 끝에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 최영숙은 엘렌 케이를 만나지 못했다
최영숙이 스웨덴으로 출발하기 석 달 전인 19264, 이미 고인이 됐기 때문이다.

자수를 놓아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공부를 해야 했지만 스웨덴의 대학생활은 행복했다
학생들은 처음 보는 동양인 학생을 친절하게 대했다
최영숙은 동양에 중국과 일본밖에 없는 줄 알던 스웨덴 친구에게 조선의 존재를 가르쳐주었다.

1930년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은 최영숙은 스웨덴 생활의 안락함을 뿌리치고 이듬해 1월 귀국을 한다. 
18세에 난징으로 떠난 지 9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귀국 전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20여
개국을 여행했다. 
특히 인도에서는 4개월간 머물면서 간디, 나이두(여성정치가) 같은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났다.
풍요가 보장된 생활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은 핍박받는 조선의 노동자와 여성을 위해 일하겠다는 초심 때문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을 때, 경제운동과 노동운동에 몸을 던져 살아 있는 과학인 경제학을 현실에서 실천해 보려했습니다
공장 직공이 되어 그들과 같이 노동운동을 할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와 보니 형편이 어려워 당장에 취직이 걱정입니다
스웨덴에 있을 때, 그 나라 신문에 투고하여 조선을 다소 소개도 해보았고, 동무 중에도 신문기자가 많았습니다
신문기자 생활에 관심이 많습니다. 조선의 실정을 아는 데도 제일일까 합니다.”(조선일보, 19311222일자)

그러나 남다른 능력과 경력 그리고 투철한 민족정신을 가진 최영숙에게 조선의 어느 직장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외국어 교수는 물론 교사 취직도 교원면허를 받지 못해 불가능했다. 신문사 여기자 자리도 여의치 않았다.
끼니를 위협 받는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최영숙은 누구에게도 경제적 곤란을 말하지 않았다
절친한 친구가 얼마간 도와주려 해도 한사코 거절했다. 다른 사람에게 구구하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생활신조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서대문 밖에 점포를 빌려 배추, 감자, 미나리, 콩나물 등을 파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귀국한 지 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19324최영숙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최영숙은 임신 중이었다. 극심한 과로와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태아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귀국 여행 중 만난 인도청년 미스터 로(Mr. Row)’와 있었던 열애 사실이 이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다.
산모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낙태수술을 받았지만 병세는 나빠져만 갔다
423 최영숙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홍파동 자택에서 27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최영숙이 조선을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을 때, 그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면할 묏자리 한 평 구하지 못해 홍제원 화장장에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이후에야, 사람들은 그에게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쏟아진 관심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요절한 인텔리 여성을 향한 안타까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단지
스웨덴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 여성이 무슨 까닭으로 인도에서 혼혈 사생아를 임신하고 돌아왔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따지자면 최영숙에게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여자로 태어났고, 너무 시대를 앞서갔고, 외국인을 사랑했고, 혼혈아를 임신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원하지도 않는 조국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왔다.
(이상 전봉관의 『경성기담』 중 "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哀史"에서 요약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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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초, 텔레비젼 리모콘이 아직 나오지 않은 시절에 "결혼하니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아내가 채널을 바꿔주는 것"이라거나
조강지처의 첫 번째 의무는 "(술 마신 뒷날) 해장국을 잘 끓이는 것"이라는 등의
망언을 농담이라고 내뱉었다가 
아내에게 졸지에 '졸혼'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

그런 주제에 무슨 신념과 지조가 있는 페미니스트라도 되는 양 최영숙의 비극을 과장하여 애석해 하기는 겸연쩍다.
'여자로 태어나 잘못'이라는 전봉관의 냉소적(?) 표현이 적절해 보인다고 해야 나의 과거와 잘 어울릴 것이다.
그래도 글을 통해서나마 최영숙 같은 삶을 만나게 되거나 OECD 28개 국가들 중에 우리나라의 '유리천장 지수'가 꼴찌라는 
뉴스를 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당한 특혜자나 가해자가 된 것 같아 마음 어딘가가 캥겨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유리천장 지수'는 영국의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가 여성에 대한 차별 -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직장내 승진 -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
다.)

세상 모든 존재의 본질은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 있다.
어느 한쪽의 자유와 속박, 평등과 차별은 또 다른 한쪽이 가진 같은 정도의 그것들이 투영된 것이다.
혼자서는 '예뻐질' 수 없고 기울어진 관계의 고통은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관계를 수평으로 돌려 서로의 '예쁜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함께 만들어야 할 일이다.
참 오래된 숙제이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거리들은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난데없는 곳에서
푸른 하늘 같은 게 보이곤 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누구도 정다운 선물을 바쳐주지는 않았다
남자들은 거수경례밖엔 알지 못했고
서늘한 눈길만 남기고 죄다 떠나 버렸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내 마음은 딱딱했으며
손발만이 밤색으로 빛났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우리나라는 전쟁에 졌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을까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붙이고 비굴한 거리를 활보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라디오에선 재즈가 넘쳤다
금연을 깨뜨렸을 때처럼 어찔거리면서
나는 이국의 달콤한 음악을 탐했다

내가 제일 예뻤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그래서 결심했다 될 수만 있다면 오래 살기로
나이 먹고 지독히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프랑스의 루오 영감님처럼 말이지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則子)의 시, 내가 제일 예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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