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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철도원 삼대』

by 장돌뱅이. 2020. 6. 29.


황석영의 새 소설 『철도원 삼대』는 제목 그대로 삼대에 걸쳐 철도원으로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이다.
해고 노동자 이진오는 아파트 십육층 높이의 공장 굴뚝에 올라 텐트를 치고 고공농성 중이다. 

"세상이 변할까? 점점 더 나빠지구 있잖아."
"살아있으니까 꿈틀거려보는 거지. 그러다보면 아주 쬐금씩 달라지긴 하겠지."
이진오는 텐트 자락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두 오늘 살아있으니 할 건 해야지."
이전에는 여러 사람이 전염병에라도 걸린 듯 스스로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절망이었고, 그것은 일상이라는 무섭고 위대한 적에 의해서 조금씩 갉아먹힌 결과였다. 집회에서
헤어지면 그들은 모두 혼자가 되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도 그들 각자가 혼자가 되었다. 
세계란 원래가 우주처럼 무심하다. 괴괴하고 적막하고 고요하다. 무료하고 가치가 없는 일상이 그들 모두를 무너뜨렸다. 
해고는 살인이다.

그는 패트병에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이 마치 살아있는 대상인양 대화를 나누며 힘든 시간을 견딘다. 

너 굴뚝 위에 혼자 있는 거 같지?” 
할머니하구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그녀는 손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보구 있느니.”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철도공작창 기술자였고 할아버지는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거쳐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흔치 않았던 정식 기관사였다. 작은 할아버지는 철도공작창에 다니다가 해고당한 뒤 노동운동과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아버지 역시 기관사였으나 한국전쟁기에 다리를 잃는 부상을 당한다. 파란만장의 이야기는 당사자들 남성이 아니라 
대부분 증조할머니(주안댁)과 할머니(신금이), 그리고 막내 고모할머니(이막음)통해 전해진다. 
그들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심신을 바쳐 수행"해 온 '철도원 삼대'라는 간고했던 시절의 한 주체이다. 

"한국은 하도 우여곡절이 많아서 여기 일년이 다른 나라의 십년이라구 하지 않더냐.
여기 십년은 바깥은 백년 세월과도 같을 게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들 수백살씩 먹은 게지."

할머니 신금이의 말은 상징적이다. 
우리의 근현대사는 서구의 역사가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이룩해온 것들을 요·압축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외세에 의한 개입과 뒤틀림까지 있었다.
"깊은 계곡을 빠르게 굽이쳐 흘러가는 성난 물결의 소용돌이 같은 세월"은 혹독했고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소설 속의 삶에 대한 긍정은 따뜻하다. 
조금은 상투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원래 진실이 그렇지 않던가.


이 모든 노력들에 의미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에서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을 통해 
그에게 전해진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

진오는 국민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그랬다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 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만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로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 <!--[endif]--> 

노동자가 높은 데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와 입장을 알아달라고 농성하게 된 것만 해두 엄청난 사회적 변화라구
우리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어.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고.”


황석영의 소설답게 스케일이 크고 유장하면서도 디테일한 장점은 여전하지만 이전에 비해 내겐 이야기의 전개가 
좀 평면적인, 헐거운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77세라는 물리적 나이를 뛰어넘는 작가의 청춘 에너지가 넘치는 소설이었다.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이어지던 철도는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세계의 근대는 철도 개척의 역사로 시작되었다.
나는 식민지 시기부터 분단된 후기 자본주의 세계화 체제의 한반도에서 지난 백여년 동안 살아온 노동자들의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일그러져왔는지 살펴보고 싶었다. 노동자의 계급의식은 감춰지거나 사라졌지만 그들의 삶의 조건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인간의 인생살이를 꿈처럼 그려보려고 하였다. 역사적 사실들이 가끔 이러한 시도를 방해하기는 했지만 항일노동운동가들의 
활동들도 옛 이야기 식으로 다루었다. 가끔 정색할 때가 있었지만 결국 옛날이야기는 퇴색한 사진이나 골동품처럼 날카롭고 선명한 
사실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것 같았다. (작가의 말)


*오래 전 나도 서울역을 돌아보며 이 땅에서 철도의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https://jangdolbange.tistory.com/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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