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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너무 쉬운 용서, 너무 앞지른 화해

by 장돌뱅이. 2020. 8. 17.


영화 『THE READER : 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 한나는 나치당에 가입하고 유대인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나는 수용소에 불이 났을 때 문을 잠궈 유대인들을 죽게 한 죄로 재판을 받는다.
한나는 직업으로 일을 택했고 그냥 맡은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답변한다.
같이 일했던 감시원들은 처벌을 면하기 위해 한나가 총책임자였다고 거짓 증언을 한다.
판사는 한나에게 사인을 한 서류를 증거로 내민다.
사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므로 서류조차도 무의미한 것이었다.
결국 한나는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한나는 10년을 복역 후 가석방을 앞두지만 교도소에서 자살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남긴 돈을 수용소 생존자의 딸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마이클은(그에게 한나는 첫사랑이었다.) 생존자의 딸을 만나 한나의 자살과 그녀가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음을 알린다. 
한나의 행위가 고의적이 아니었음을, 사고가 그녀만의 책임이 아님을 호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한나의 유언을 냉철하게 거절하며 한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게 변명거리가 되나요?"   


얼마 전 우리 사회는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백선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201123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태어났다. 19393월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평텐(奉天)에 세운 중앙육군훈련처(봉청군관학교)19403월 입학해서 
194212월에 제9기로 졸업하고 견습군관을 거쳐 1943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佳木斯)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9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패망으로 해산할 때까지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에 
대해 모두
108차례 토공(討攻)작전을 벌였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했다


백선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대령)으로 재직하면서, 좌익을 제거하기 위한 숙군(肅軍)작업을 지휘했다.
1948년 11월, 박정희 소령이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에 앞장서 문관 신분으로 정보국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그는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50년 7월 준장, 1951년 4월 소장, 1952년 1월 중장, 그리고 1년 뒤인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군에서 예편한 이후에도 화려한 횡보는 계속되었다. 1960년 7월 주중화민국대사, 1961년 7월 주프랑스 대사, 
1965년 7월 주캐나다대사를 거쳐 1969년 10월부터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1973년 4월부터는 1980년 3월까지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친일과 독재의 인물에 대한 비판이 있을 때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해당 인물의 공과를 들어 공은 인정하고 
과는 기억하자는 식의 논리를 펴왔다. 어떨 때는 공은 과장되고 과는 축소된 '대차대조표'로 영웅이나 위인을 산출해내기도 했다.
백선엽은 일제 강점기 동안 자신이 저지른 반민족주의적 행위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았다. 

대신 한국전쟁 기간 중 '
공산당과 싸워 나라를 구한 공적'은 자주 강조되었다.
(그의 공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당시 참전 군인의 증언도 있지만.) 

친일과 반공은 맞교환 되거나 상쇄될 수 있는 가치일까? 나는 판단의 준거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이상을 받들고, 이념적 정체성을 담아내는 곳이 국립묘지라면,
그곳에 서로 상반된 가치의 독립과 친일, 민주와 독재는 혼재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곳은 단지 유명인사들의 무덤일 뿐이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  미라보(MIRABEAU)백작은 구체제 타도의 선도적 역활을 했다. 
혁명의 와중에 갑작스레 사망한 그는 프랑스 국립묘지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그러나 후에 그가 루이16세와 내통한 기회주의적 행적이 드러나 그의 유해는 국립묘지에서 축출되었다.
역사의 진보를 담당한 혁명세력은 혁명과 반혁명을 오고간 그의 '공'과 '과'를 저울질하거나 적당히 버무리지 않았다.
이 일로 프랑스에는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지닌 애국적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10년의 유예기간을 두어 
그의 정치적 공과를 국민적으로 검증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이겨 프랑스 국민들의 존경을 받던 페텡 원수 경우도 그랬다.
그는 1940년 나치
독일에게 항복하고 협력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 받고 외단 섬에 유배 중 사망한다. 
그는 국립묘지는 물론이고 유명 장군들이 묻히는 묘역에도 묻히지 못했다.

국립묘지에 '일본군'의 유해를 안장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우리와는 비교되는 엄정함이다.

광복절을 맞아 친일잔재 청산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사실 식민지 잔재 청산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언제나 반복해서 자문하고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문제이다. 
어느 정치인은 이에 대해  "역사는 우여곡절이 많아 모두 청산하고 가기에는 너무 어렵다. 또 옳고 그름을 따지기도 
굉장히 어려운 면이 많다"며, "잘못도 있지만, 오늘의 역사를 만드는데 동참한 분들의 공적은 인정해야 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또 다른 정치인은 "태어나 보니 일본 식민지였고 식민지의 신민으로 살아가면서 선택할 수 없는 인생 경로를 살았던 사람이 있다"며
비록 모두가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했지만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갔던 게 죄는 아니다"라고 했다.
이럴 때 영화 속 생존자 딸의 대사가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겠다.
"그게 변명거리가 되나요?"  

아무리 어려워도 따질 것은 따지고 청산할 것은 청산해야 한다.
그것이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에게 주어진 첫 번째 과업이자 자립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친일파라고 할 때 질곡의 시기를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을 일컫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일신영달만을 위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력했던 세력들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해방 후 그들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정치인은 "대한민국이 새로운 미래로 나가기 위해서는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진부한 덕담(?)을 덧붙였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딸의 대사는 계속된다.
"감동을 원한다면 영화를 보러가요. 아님 책을 읽던가."

어떤 사안이 있을 때마다 너무 쉽게 용서를, 너무 앞질러 화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덮어두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용서와 화해는 '지당하고 거룩한 말씀'만으로 저절로 얻어지는 추상적 덕목이 아니다. 
명확한 사실
규명과 엄정한 정리 이후에야 가능한  실천 규범이다.
 

 "미래는 앞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온다"고 하지 않던가.

(*관련 글 :
https://jangdolbange.tistory.com/1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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