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사랑밥을 끓이며

by 장돌뱅이. 2021. 10. 27.

"모든 기념할만한 사건은 아침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그렇게까지는 몰라도, 따릉이를 타고 강변을 달리는 기분은 분명 다시 '기념해도' 좋을 일이었다.
얼굴에 부딪혀오는 가을 바람은 차면서도 싱그러웠고 햇살을 머금은 둔치의 억새는 화사했다.
가끔씩 페달을 멈추고 사진을 찍으며 해찰을 부렸다.
뚝섬에서 목적지인 nono스쿨까지는 천천히 달려도 30분이면 충분하다.

nono스쿨은 2년 전 일년 동안 나에게 음식 조리를 포함하여 식문화 전반에 관해 가르쳐 준 곳이다.
졸업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모여 주변의 혼자 사는 나이 드신 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
나로서는 모처럼만이었다. 그동안  '손자저하를 모신다'는 이유를 들어 자주 참석하지 못했다(안 했다?). 앞으로는 자주 참석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노노스쿨의 문을 열었다.
기념할 만한 일은 역시 아침 분위기에 일어나는가 보다.

이번에 도시락을 채울 음식은 떡갈비, 해물 잡채, 구운 가지 무침, 무생채 등이었다.
내가 속한 조는 그중에서 구운 가지 무침과 무 생채를 맡았다. 
가지와 무를 씻고 자르고 절이고 기름 둘러 굽고 양념을 만들어 무치고······.
도시락에 담아놓으니 꽃처럼 화사하다.

남은 음식을 참석자들이 둘러앉아 떠들썩한 이야기와 함께 나누었다. 
사람 이외에 지구 위에 어떤 존재도 음식을 조리해서 먹지 않는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는다.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행위는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행동이고 재능이다.

부엌일을 맡으면서 매번 느끼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메뉴를 정하는 일이다.
아직 초보이지만 어떻게 만들지는 '무얼 해 먹지?'보다 부차적인 고민이다.
초행길도 네비만 따라가면 되듯 인터넷이나 책에 레시피가 쉽게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노노스쿨에서 돌아온 저녁에는 그런 고민이 필요 없어 좋았다.
nono의 메뉴를 한번 더 만들면 되었다.
옛날처럼 오늘도 무생채와 가지구이를 만들고
대신에 아내가 좋아하는 팽이버섯전을 추가하였다. 
아내와 함께 식탁에 앉는 순간 음식은 단순히 재료들의 물리적 조합이 아니다.

내 눈물은 빚더미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내 발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익히고
내 길은 무엇을 잘못했나 살핀다

내 생의 반은
실수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꿀이 흐르는 길을 잃고
일만 하느라 사랑을 잃고
나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내 손은 뒤늦게
일으켜세우는 법을 익히고
어두운 몸에, 새 봄을 지피고 있다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고
함께라면 누구도 부럽지 않게
꿈의 아궁이에 해를 넣고 
사랑밥을 끓이고 싶다

내 마지막 사랑과 밥
당신들에게 다 나누어주겠다

-  신현림, 「사랑밥을 끓이며」-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의 국가장  (0) 2021.10.31
결혼37주년입니다  (2) 2021.10.29
가을은 하늘이 다 해요.  (4) 2021.09.20
나의 삼국지 읽기  (2) 2021.09.16
2호의 돌  (2) 2021.09.1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