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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나의 삼국지 읽기

by 장돌뱅이. 2021. 9. 16.


내가 『삼국지』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이 아니라 구술을 통해서였다. 초등학교 졸업을 눈앞에 둔 2월,
담임선생님은 책상을 뒤로 물린 채 걸상만으로 난로가에 동그랗게 우리들을 앉힌 후 며칠에 걸쳐 삼국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까지 동화책이나 만화를 통해 유비와 관우, 장비 등의 이름 정도만 알고 있던 내게 선생님의 삼국지는
광활한 벌판에 말 달리는 소리가 우렁찬 박진감 있는 세상이었다.
유비에게 제갈량을 추천한 서서(徐庶)와 서서 어머니, 그리고 관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이 서서 모자의 사랑과 효성,  관우의 용맹과 충절을 특별히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적벽대전 이후 관우가 조조를 놓아주는 어름에서 끝났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동안 유비를 비롯한 삼 형제가 기세를 몰아 '악당' 조조를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했다고
마음대로 상상하며 지냈다.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박종화의 삼국지를 동네 형에게 빌렸지만 선생님의 이야기만큼 재미가 없어 작심삼일로 그쳤다. 
그 뒤 김광주의 삼국지를 잡았지만 역시 끈기 부족으로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삼국지를 처음으로 완독한 것은 성인이 된 이후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였다. 만화 체질인(?) 나로서는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그 뒤 책으로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2000년대 초에야 황석영의 삼국지로 완독할 수 있었다.   
매 장마다 끝마무리가 '어찌어찌할(될) 것인가?' 하는 투로 끝나는 것이 특이했고 간결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가 인상적이었다.
최근에 읽은 이문열의 삼국지는 곳곳에 상황에 맞는 참고 문헌을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달아 평역이라고 했다.
삼국지 본연의 예스러움에 현대적 신선함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읽기 편하면서도 여러 정보가 더해진 풍성함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넷플릭스를 통해서 중국 CCTV가 제작한 95부작 삼국지를 장장 세 달에 걸쳐 봤다.
세련된 컴퓨터 그래픽에 익숙해진 요즈음의 눈에 비슷비슷한 전투 장면 등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책을 읽으며 상상하던 장면을 눈으로 보는 재미에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삼국지는 이야기와 만화, 책과 영상으로, 어릴 적부터 익숙한 옛이야기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 접하기도 한단다.
삼국지를 번역한 작가들도 많고 관련 서적도 많다. '삼국지 산업'이라는 말이 과장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삼국지』는  위 ·촉·오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진수(陳壽)의 역사서 『삼국지』에 
나관중이  여러 시대에 걸쳐 전해오는 민간설화와 재담, 자신의 창작을 더한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意』를 말한다.
열 중에 사실은 일곱이고 나머지 셋은 허구라고 한다. 황석영은 "이 나머지 셋이야말로 각 시대를 통해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민중들의 꿈과 소망이 반영되어 있는 부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역사의식"이라고 했다.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들은 세상에 자신의 뜻을 세우고자 무리를 짓고 명리와 의리를 선택하며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을 반복해 왔다. 
우주를 항해하는 시대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그 옛날의 삼국지를 읽는 이유는
삼국지 속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는 삼국지 인물들을 통해 조직 경영이나 처세의 지혜를 얻고 또 어떤 이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경구를 얻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에 관우를 제일 좋아했던 건 다분히 담임선생님 이야기 덕분이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없었더라도 무거운 청룡언월도를 가볍게 휘두르는 힘과 용맹,  더불어 굽힘 없는 충절에
사로잡은 적 조조를 놓아주는 너그러움까지 지닌 그는 매력이 넘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관우는 사후에 관후(關侯)로 불리며 위대한 장수로  추앙을 받다가 관제(關帝)라는 황제로까지 격상되었다.
나중에는  관왕(關王)으로 신격화되어 그를 기리는 관왕묘가 곳곳에 세워졌다.
중국에는 어느 도시나 마을에도 관왕묘가 있으며 전국에 걸쳐 약 30만 개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서울 동대문 근처에  '동묘(동관왕묘)'가 있고, 해외의 중국 문화권 곳곳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관우의 오만과 독단에서 자신은 물론 촉의 몰락을 재촉한 것 같아 예전만큼 좋아하지는 않게 되었다.  

관우 이후에는 조자룡과 제갈량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각각 무인과 지식인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의 백만 대군 사이를 홀로 돌파하여 구해낸 조자룡은 죽을 때까지
싸움에서 단 한 번도지지 않은 걸출한 장수이면서도 본연의 자세를 결코 잃지 않은 진정한 무인의 전형이었다.

제갈량은 유비가 추구하는 촉한정통론의 대의명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과 노력을 바쳤다.
'한 나라의 승상이면서 재산이 겨우 뽕나무 팔백 그루에 밭 쉰 뙈기라는 그 검소와 무욕(無慾)을 상기하면,
다른 모든 걸 젖혀두고라도 비범하고 고결한 인물'이었다.

역사서 『삼국지』를 쓴 진수는 제갈량에게 죽음을 당한 진식(陳式)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죽인  당사자임에도 진수는 제갈량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남겼다.
그럴 만큼 정치가, 군사 전략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제갈량은  출중했던 모양이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각 당마다 많은 후보들이 경선을 치르고 있다.
진수의 글을 그들과 그들의 공약에 비추어보면 선택의 기준이 좀 더 명확해질지도 모르겠다.

<제갈량은 나라의 승상으로서 백성을 따뜻이 어루만지고, 예의와 규범을 보여주었으며, 벼슬자리를 줄여
백성의 짐을 덜고, 권위와 제도를 따랐다.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탬이 된 자는 비록 원수일지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어기거나 일을 게을리한 자는 비록 가까운 이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죄를 지었더라도
스스로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비록 그 죄가 무거워도 놓아주었으며, 교묘한 말로 변명하려 드는
자는 비록 그 죄가 가벼워도 반드시 벌주었다. 작은 일을 작다 하여 포상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나쁜 짓도
작다 하여 꾸짖지 않는 일이 없었다. 모든 일을 곰곰이 살펴 행하고 사물은 그 근본을 헤아려 다스렸다.
명분을 따르되 실질도 잃지 않았고, 거짓된 것은 아예 입에 담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 안이 모두 두려워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는데, 다스림과 죄 줌이 비록 엄해도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음씀이 공평하였으며,
경계하는 것과 권하는 것이 뚜렷해서였다.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할 만하다.>

- 이문열의 『삼국지』에서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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