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주에서 보낸 한 달은 산과 바다, 숲과 길, 사람과 음식들로 아름다웠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그 기억들은 진한 여운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여행의 소중함은 새로운 경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 만나는 현실의 진부함을 견디게 하고 또 새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삶에 비유하거나 삶을 여행에 비유할 것입니다.
당신과 제가 함께 삶의 시공간을 여행한 지 서른 하고도 일곱 해가 지났습니다. 제겐 지나간 많은 순간들이 바로 어제 아침에 마주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셨던 기억처럼 생생합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던 무교동 길과 음악 다방에 흐르던 옛 노래, 당신과 걷던 오월 어느 날의 진한 아카시아 향기, 군입대 하던 날 당신이 입고 나왔던 자줏빛 줄무늬 원피스, 신혼의 가난한 단칸방, 막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 딸아이를 위해 고른 앙증맞은 첫 신발과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짜릿한 기쁨이나 자지러지는 감동이 아니어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작은 기억들만으로 지난 37년은 충만합니다. 미래는 과거에서 온다는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우리가 지금 시작하는 38년은 그리고 그보다 먼 앞날은, 우리의 그런 37년에서 올 것입니다.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 김광규, 「밤눈」-
37년!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방이 되고, 또 서로의 바깥이 되고자 했다고 감히 자신해 봅니다. 밥 한 상을 차려 함께 여행한 당신께 바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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