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버스 정거장에 붙어 있던 포스터다. 글이 재미있어서 찍어 보았다.
개별적으로 모르는 단어가 몇 개 있지만 문장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문제가 없다.
'봉근'은 '보다'라는 의미로 예상하며 알아보니 '주운'이라는 뜻이었다.
'하영'은 문맥 상으로 '많이'와 같은 말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삼촌'은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읽으며 알게 된 단어다.
제주도에서 '삼촌'은 반드시 친인척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일반 명칭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도 삼촌이라고 한다.
위미항 근처 바닷가 길을 따라에 제주말을 써놓은 비석이 줄지어 있었다.
하나하나 읽다보니 어떤 제주말은 제주 토박이가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 같았다.
버스정거장에도 그렇게 '제주스러운' 이름들이 붙여져 있었다.
"고래왓, 광대왓, 수모루, 여의물, 아랑조을거리, 맹살공원, 뒤통모루, 폭낭사거리, 고망난돌, 지경곰, 영등물, 진드르,
불미터, 올리수, 수망가름, 디삘레, 사리물, 독벌은이동산, 먼나먼루, 새가름, 초망가름, 어두모루, 지세못, 속도르,
반참모르, 등등"
'드르' 는 들을, '왓'은 밭을 의미하는 제주 말이라는 걸 귀동냥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이름들은 그 의미를 가늠할 수 없다.
그렇지만 1동(洞), 2동이라던가 1가(街), 2가 하는 식의 도회지의 기능적인 이름보다는 지역 정서와
밀착되어 있는 것 같아 정겹게 느껴졌다.
제주말은 육지와 고립된 지리적 환경에 몽고말과 일본말의 영향까지 받으면서 독특하게 형성되었으며,
옛날 육지에서 전파된 우리말의 원형이 남아 있어 신라시대 향가를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제주말은 촘말로 귀허고 곱딱한 보물" 같다.
올레 5코스는 남원포구에서 시작하여 큰엉 경승지, 위미항, 공천포를 거쳐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13.4km의 길이다.
한 번에 주파하는 것은 무리고 그럴 생각도 없어 두세 번 나누어 걸었다.
매번 맑은 날이어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가 계속 옆에서 따라왔다.
작은 항구와 포구를 지나기도 해서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길이었다.
5코스의 출발지인 남원은 숙소에서 멀지 않아 한달살이 동안 부식을 사러 자주 찾은 곳이다.
규모가 큰 하나로마트가 있고 식당도 많다. 남원의 식당 중에는 회를 파는 강원수산이 가장 좋았다.
큰엉은 '큰 언덕'을 말한다. 언덕 아래 로는 절벽이고 파도에 패인 동굴의 절경이 있다.
숙소의 이웃은 매일 새벽이면 이곳에 나가 낚시를 했다. 다니던 직장을 잠시 쉬고 제주살이를 하러 왔다고 했다.
그에게는 낚시가 휴식인 것 같았다.
올레길 가까이 있는 카페 "와랑와랑"의 창밖으로는 귤밭이 펼쳐져 있다.
햇빛과 귤빛으로 가득한 밭을 보니 와랑와랑을 의미에 앞서 느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 주인에게 물어보니 느낌과 비슷한 설명을 해주었다.
"어떤 것이 풍성하게 매달려 있거나 모여서 와글와글 거리는 것 같은···"
위미리의 동백나무군락은 백 년 묵은 방풍림이다. 옛날 위미리에 시집온 현맹춘이라는 할머니가 척박한 땅을 개간하면서
바람을 막기 위해 밭 주위에 심어서 생긴 숲이라고 한다. 이곳 동백은 둘레는 가늘지만 키는 10미터 이상으로 높다.
처음 나무를 심을 때 간격을 조밀하게 심어 나무들이 자람경쟁을 하면서 줄기는 가늘고 키가 커진 것이라고 한다.
동백꽃 철에 오면 더 장관이겠지만 훤칠한 나무를 보며 걷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위미항은 소란스럽지 않은 조용한 항구(포구?)다.
휴식을 취하는 배 몇 척이 잔잔한 물결에 흔들리고 있고 바위를 스치는 파도소리도 잔잔했다.
근처에 위미항을 닮은, 아내와 내가 좋아했던 식당 "뙤미"가 있다.
주 메뉴는 세 가지, 보말미역국과 비빔밥 그리고 순댓국이다.
계절에 따라 서리태 콩국수와 뚝배기 소불고기가 더해진다고 한다.
두 번을 가는 동안 아내는 비빔밥만을 골랐고 잡식성의 나는 미역국과 순댓국을 경험했다.
요란스럽지 않은 정갈한 상차림이었고 맛깔스러웠다. 점심 무렵까지만 문을 열고는 닫는 영업 방침도 여유로워 보였다.
지나고 나니 '뙤미'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진다.
뙤미를 나와 다시 올레길을 따라갔다. 변함없이 바다가 이어진다.
바람이 불었다.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좋을 정도의 바람이다. 김광석의 노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흥얼거리며 걸었다.
강한 햇살에 며칠 사이에 피부가 검게 그을렸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축복 같은 날씨의 연속이었다.
공천포에 있는 "카페 숑"은 다른 일행과 함께 들렸다.
사람들로 다소 소란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창틀에 담긴 바다 풍경은 그림이었다.
며칠 뒤에 간 공천포 "카페 지니"의 빵 냄새도 좋았다.
올레길 5코스는 여기까지 걸었다. 넙빌레를 거쳐 쇠소깍까지 가는 길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생략해도 좋을 구간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다.
가급적 "차랑 타지 말앙 촌촌히 걸으멍 지꺼지게 놀당"보니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드시 올레길이 아니어도 걸을 곳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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