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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눈이 온다

by 장돌뱅이. 2021. 12. 18.


아침부터 대설주의보 문자가 반복해서 뜨더니 오후부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우성치듯 날리는 눈으로 삽시간에 창문이 자욱해졌다.


"와 눈이다!"

아내와 소리쳤다. 첫눈엔, 특히 오늘처럼 함박눈일 땐 더욱 아이들처럼 되곤 한다.
어린 시절 초겨울에 접어들면 일삼아 첫눈을 기다렸다. 어느 날 저녁에 무심코 방문을 열었다가 마당에
하얗게 깔린 달빛을 첫눈으로 착각하여 소리를 지르는 통에 놀란 어른들의 지청구를 들은 적도 있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첫눈을 기다렸던 기억이 오래 남은 이유는 그 일이 내게 아름다움의 시원(始原) 같은 의미여서가 아닐까?


"창 넓은 카페에 앉아서 따뜻한 커피나 마시면 좋겠네."
"바다가 보이면 더 좋겠지."
"산이나 벌판을 건너다 보이는 카페도 괜찮을 것 같은데."

눈을 바라보며 두서없이 말을 주고받다 아내와 공원 산책을 나갔다.
하지만 점점 더 거세진 눈발에 멀리 가지 못하고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때마침 손자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여기 눈 와요!"
어린 시절의 나처럼 손자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눈사람을 보여주었다.
"여기도 눈 많이 온다! 눈사람 멋지네!"
나와 아내도 손자가 되어 소리쳤다.


그리운 것이 다 내리는 눈 속에 있다.
백양나무 숲이 있고 긴 오솔길이 있다.
활활 타는 장작 난로가 있고 젖은 네 장갑이 있다.
아름다운 것이 다 쌓이는 눈 속에 있다.
창이 넓은 카페가 있고 네 목소리가 있다.
기적 소리가 있고 바람 소리가 있다.

지상의 모든 상처가 쌓이는 눈 속에 있다.
풀과 나무가, 새와 짐승이 살아가며 만드는
아픈 상처가 눈 속에 있다.
우리가 주고받은 맹서와 다짐이 눈 속에 있다.
한숨과 눈물과 상처가 되어 눈 속에 있다.

그립고 아름답고 슬픈 눈이 온다.

-신경림, 「눈이 온다」-


그립고 아름다운 일은 물론, '한숨과 눈물과 상처'의  슬픈 일까지 쌓이는 눈처럼 차분히 묻어두는 일.
나로서는 아직 쉽게 이르지 못할 경지다.
첫눈 오는 날엔 다만 그립고 아름다운 일들만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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