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손자가 만들어 준 그릇

by 장돌뱅이. 2022. 1. 7.

"저 재료들 한꺼번에 다 쓸어 넣고 그냥 잡탕 찌개로 끓여도 맛있을 건대 뭘 저리도 지고 볶으며 수선을 피우는 것인지······ .
신혼 초 어느 휴일 아침, TV 요리 강좌를 보며 열심히 메모를 하고 있는 아내에게 무심히 던진 나의 말이었다.
아내는 요리와 주부들에 대한 독설이자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이야 식사가 몸속에 기초대사량에 필요한 영양분을 채워 넣는 '주유(注油)' 행위 이상의 소중한 의미를 지닌 일상이고,
음식은  '잡탕찌개'의 불필요한 변형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젊은 시절엔 요리교실이란 걸
다분히 유한마담들의 심심풀이쯤으로 인식하고 있기도 했다.


한 번은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릇 자체보다 그 안에 담는 내용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릇이야 뭐 그냥 용기일 뿐이잖아."
음식과 그릇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아내에게 농담으로 했는데 듣기에 따라선 비아냥처럼 되었다.

멋은 맛에서 온다지만, 맛도 멋에서 오며 혀끝만이 아니라 오감이 모여서 만드는 종합체라는 사실도,
나이 먹고 특히 부엌일을 가까이하면서야 깨닫게 되었다. 

손자가 만들어 선물한 접시


 손자친구가 제 엄마를 따라 도예교실에 다니면서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접시를 선물했다.
바닥에 검정색을 붓가는 대로 마구 칠해 놓아서 식기 사용하기에는 좀 '대략 난감'한 그릇이었다.
아마 도예 선생님이 모양은 바로 잡아 주면서도 색은 뒷수습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담배 재떨이로 딱 좋을 모양새다.

하지만 비록 손님 상에 내놓기는 곤란하다 해도 아내와 내겐 친구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직접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릇이다.
"고마워. 우리 보물이 만든 거니 할아버지가 매일 잘 사용할게."
나는 과장된 억양의 말로 고마움을 전하면서 손자를 안아주었다.

물론 약속처럼 그 그릇을 자주 사용하진 않는다.
친구가 집에 왔을 때 가끔 좋아하는 간식을 담아 주며 생색을 낼 뿐이다.
"이 그릇 네가 만들어준 거잖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 쓰고 있지."
대개의 경우 친구는 먹는데만 집중할 뿐  자신이 만든 그릇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진 않는다.



친구의 그릇은 식탁에 두고 관상용으로 쓰고 있다. 
도예교실 첫날 선생님이 물레를 설명하자 친구는 뭔가 찜찜하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즈음에 읽었던 동화 속 공주가 마녀의 물레에 찔려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툰 솜씨의 그릇에 스며 있는 손자의 겁먹은 표정이 웃음을 짓게 한다.

한자로 그릇을 뜻하는 '기(器)'에는 네 명의 (식)'구(口)'와 '개(犬)' 한 마리가 있다. 
한 집에 사는 개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그릇)을 기다리는 모습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이 나눌 정겹고 따뜻한 음식이 푸짐히 담겨 나오는 다음 장면이 상상된다.

그릇을 단순히 내용물을 담거나 옮기는 보조수단으로만 생각했던 오래전 나의 단견은 확실히 철회되어야 한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란  (0) 2022.01.12
보름달 속의 반달  (0) 2022.01.08
새해 첫날  (2) 2022.01.02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0) 2021.12.31
수수께끼와 마술의 한 해  (0) 2021.12.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