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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영화 『거룩한 분노』

by 장돌뱅이. 2022. 3. 17.

영화 『거룩한 분노』 오리지널 포스터


1971년 스위스.
노라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키우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정주부다. 매일 가족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크게 아쉬울 것 없이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전 해방될 필요가 없어요."
여성해방운동을 하는 단체에 가입하라는 권유에 노라는 담담히 대답한다. 같이 싸우지 않으면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에도, "무슨 소용이죠? 달라지지도 않을 텐데" 하고 대답할 뿐이다. 놀랍게도 그때까지 스위스 여성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하지만 노라는 일상생활 속에서 점차 여러 가지 제도적 모순과 차별을 깨닫게 된다.
어린 조카의 사랑을 둘러싼 편견과 그 대처 과정에 최종 책임은 오로지 남성인 아버지에게만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가사 이외의 직업을 가지려는 자신의 꿈도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남편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한다.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직업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바지를 입는 것조차  시아버지의 '옛날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눈쌀을 견뎌야 한다.
"바지라니, 그것도 (몸에) 딱 붙는!"

"개인적인 것은 결국 정치적인 것(The personal is political)"이다.
노라는 고민과 갈등 끝에 마침내 시위의 전면에 서고 가사파업을 일으킨다. 

여성 투표권에 관한 찬반 투표를 앞두고 마을은 술렁인다. '여성 정치화 반대 행동위원회'라는 단체의 여성 회장은 앞장서서 여성의 정치 참여 반대를 주장한다.
"소위 해방이라는 말은 여성에 대한 저주"이며 "가정에 헌신하는 건 여자의 특권이다" 라거나 "성평등은 자연에 반하는 죄악"이며 "스위스 여성은 투표권이 없어도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등등.

노라의 활동으로 남편은 직장 동료와 마을 남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 압박은 가중되지만 노라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여성의 투표권은 확정된다. 1981년에는 성평등 원칙이 헌법에 포함되고, 1990년에는 스위스 전역에서 여성 투표권이 인정된다.

영화 『거룩한 분노』 스틸 컷


2019년 6월 스위스 전역에서 수십만 명의 여성이  거리로 나와 파업과 시위를 벌였다. 
주된 이유는 남녀 간의 임금 차별이었다. 2016년 기준 스위스의 여성은 비슷한 일을 하는 남성 노동자에 비해 평균 12%의  적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28년 전인 1991년에도 대규모의 시위가 있었다. 스위스에는 아직 가부장적 문화도 잔존하고 여성에 대한 가정과 사회의 폭력도 위험 수준이라고 한다. 법과 제도적인 평등은 보장되었지만 아직 실생활에 안착되지는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정은 더욱 열악하다. 2022년 3월 10일 인력관리 기업 인크루트는 남성과 비교해 여성의 임금 수준이 70% 정도라고 밝혔다. 격차가 수십 년째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이외에 국가별 유리천장 지수 등 남녀 차별을 나타내는 각종 지표에서도 우리나라는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소설『82년 생 김지영』식으로 말하면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며칠 전 끝난 대선 과정에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서 남녀 간 건전한 교제 같은 것도 정서적으로 막는 역할을 많이 한다는 얘기도 있더라”며 페미니즘이 저출생의 원인이라는 취지의 황당한 발언을 하는 후보도 여전히 있지 않던가.

노라가 영화 초반 아이들과 지구본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읇는 대사는 스위스만이 아니라 모든 여성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는 말 같다.
"태평양에는 엄청 많은 물고기가 아주 깊은 곳에서 산단다.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서 사는 놀라운 생명들이야. 큰 것, 작은 것, 점박이와 줄무늬, 그리고 투명한 것. 저 멀리, 해와 빛이 있다는 걸 모른단다." 


투표권이나 평등권처럼 오늘날 우리가 주체적 인간으로서 누리는 많은 가치와 권리들은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당연'이고 '상식'이며 '합법'의 이름으로 고여 있는  '어둠과 고요'를 누군가 자각하고  맞선 결과물이다. 꿈은 이제까지 세상에 없는 것이기에 꿈이다. 그것을 주장하는 순간 누군가는 뭔가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갈등은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발전은 언제나 그런 '불온한' 질문과 행동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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