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짧고 결혼은 길다. 연애가 '너의 한마디 말이나 웃음이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되는(김창완의 노래)' 신비로운 단거리 달리기라면, 한 사람과 수십 년을 함께 해야 하는 결혼은 그런 신비를 둔화시키는 장거리 마라톤이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의 마고는 남편 루와 5년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큰 불만이나 문제는 없다. 루는 다정하고 둘이서는 장난도 잘 친다. 상대가 양치질하는 화장실에서 스스럼없이 변기를 사용할 정도로 익숙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루와 보내는 생활은 어딘가가 점점 헐거워지고 있다. 요리 연구가인 루가 매일 만드는 닭요리처럼 일상은 단조로운 톤으로 반복된다. 장난이건 키스건 한 번에 한 가지씩만 하고 싶어진다. 나란히 앉아 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권태가 묻어난다.
지진 소식을 전하는 뉴스 앵커의 멘트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강도 5의 지진이 두 지역을 강타했습니다.
잘 알려진 이유들 외에 지진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결혼기념일 외식 자리에서 둘 사이 일어나는 '지진'의 원인이 엿보이기도 한다.
"아무 얘기나 좀 해봐."
"왜?"
"그래야 대화를 하지."
"(잠시 생각) 난 할 말 없는데······ 대화를 위한 대화는 싫어."
"그럼 내가 요새 어떤지 물어보든가."
"그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거잖아."
"그냥 말없이 밥만 먹는 게 좀 웃기지 않아?"
"뭔 얘기를 해, 같이 살고 모든 걸 다 아는데······."
"그럼 외식은 왜 해?"
"맛있는 거 먹으려고. 근사한 데서 같이 맛있는 거 먹자는 거지. 서로 근황 물어보자고 온 거 아니잖아. 자기야, 왜 그래? 사랑해! 오늘은 우리 결혼기념일이고 나 당신 사랑해, 알지? 결혼기념일 축하해! "
"나도 사랑해!"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마고는 대니얼이란 남자를 만난다. 재미있는 대화를 주고받는다. 알고 보니 바로 길 건너편에 산다. 마고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 결혼했어요" 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보지만 마음속 소용돌이는 점점 커진다. 그러면서도 두렵다. 마치 이 비행기에서 저 비행기로 갈아타야 하는 환승장에서 잘 모르는 곳을 뛰어다닐 때처럼.
"비행기를 놓치는 건 두렵지 않아요. (···) 비행기를 놓칠까 봐 걱정하는 게 두려워요. 사이에 끼어서 붕 떠있는 게 싫어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제일 두려워요."
마침내 마고는 루고와 나누는 느릿한 생활 대신에 '새것'의 설렘과 재치 있는 대화, 함께 있다는 느낌이 생생한 대니얼로 '환승'을 한다.
"가끔은 새로운 것에 혹해. 새것들은 반짝이니까. 새것도 헌 것이 되죠. 맞아요. 새것도 바래요. 헌것도 원래 새것이었으니까."
영화 속 수영장 샤워실에서 여인들이 나누는 말이다. 만남에서 생활로 건너오면 하루하루는 더 이상 놀이기구 스크램블러처럼 빠르고 짜릿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현란하던 조명과 흥겹던 음악이 꺼진 뒤에는 몇가닥의 전선과 잿빛 전등만 남는 것처럼 '새것'은 다시 익숙한 '헌것'이 되는 것이다.
붉은 줄무늬의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발톱에 파란색 패디큐어를 한 마고.
부엌에 서서 열심히 빵 반죽을 한다. 그리고 오븐 옆에 앉아 빵이 익기를 기다리며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때 누군가 아무 말 없이 그 옆을 지나 흐린 실루엣으로 창가에 선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 거의 똑같은 이 장면이 두 번 반복된다. 새것은 선택할 수 있지만 일상은 한순간에 내릴 수 있는 놀이기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새것'과의 만남과 연애는 환상이지만 결혼은 현실이고 '헌것'이 되는 과정이다. 결혼은 상대방과 라면에 달걀 넣을 타이밍을 논의해야 하고 탕수육의 부먹과 찍먹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은 세련된 웨이터가 날라다주는 달콤한 음식이 아니라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만든 찌개가 가스렌지 위에서 끓어 넘치는 것이다. 방구석에 쌓인 먼지를 젖은 걸레로 닦아내고 입었던 옷을 빨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 같이 몇십 년 동안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 말이었던가.
"환상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환상과 허구의 서사를 현실과 교묘히 엮어서 진화해 온 종이기 때문이다. 다만, 환상은 환상일 뿐임을 명확히 소비할 줄 알며, 환상에 팔려가지만 않으면 된다."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문정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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