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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루리의 글과 그림, 『긴긴밤』

by 장돌뱅이. 2022. 5. 29.

소설 『긴긴밤』 속의 그림(위)과 내가 흉내내 본 그림(아래)


딸아이가 중학교에 막 입학한 직후 무슨 일이 있어 하굣길에 마중을 간 적이 있다. 딸아이는 내가 데리러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정문 근처에 차를 대고 차창 너머로 멀리 아이들이 나오는 학교 본관의 문을 주시했다.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서 지칫 딸아이를 놓칠까 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쓸데없는 기우였다. 아이들 틈에 섞여 딸아이가 나오는 순간 꽤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나의 눈은  성능 좋은 줌렌즈가 달린 카메라처럼 딸아이를 단번에 포착해낼  수 있었다. 마치 어떤 섬광이 번쩍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부모와 지식을 잇는 보이지 않는 끈 때문이리라.

루리의(처음에 나는 외국작가인 줄로 오해했다.)『긴긴밤』에서 코뿔소 노든은 나중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어린 펭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코뿔소 노든은 어릴 적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랐다. 노든은 코와 귀가 어린 코끼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어렴풋이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코끼리들은 노든의 다른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노든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코뿔소 노든은 코끼리와 떨어져  홀로 세상으로 나간다. 코뿔소로서 사랑하고 상처받고 분노하고 다시 사랑한다. 세상은 살기보다 죽기가 더 쉬운 곳이었지만 자기보다 앞서간 가족과 친구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는다. 삶은 노든과 펭귄에게만 혹독한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사막은 황량해  보이고, 그 위를 걷는 나와 노든은 가망이 없는 두 개의 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모래알 사이를 끊임없이 지나다니는 개미들과 듬성듬성 자라난 풀들, 빗물 웅덩이에 걸터앉은 작은 벌레들 소리, 조용히 스치는 바람과 우리의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막은 모래 속에 숨은 생명들로 가득했다. 살아남은 기적은 우리에게만 특별하게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코뿔소 노든은 죽은 친구의 꿈이었던 바다를 향해, 친구가 남긴 어린 펭귄과 함께 걷는다.
황량한 사막을 건너고  '긴긴밤'을 지나 마침내 펭귄을 바다에 닿게 해준다.

세상의 어떤 존재도 혼자선 특별할 수 없다. 관심과 사랑이 서로를 특별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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