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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상처와 위로, 소설 『밝은 밤』

by 장돌뱅이. 2022. 5. 24.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진은영의 시, 「가족」-


최은영의 장편 소설 『밝은 밤』을 읽으며 이 시를 여러 번 떠올렸다.
시는 아마도 밖에서 제 아무리 빛나고 아름다운 것도 가족이 있는 집에서는 무의미해진다는, 가족은 세상의  명성이나 평가와는 다른, 보다 근원적인 가치 위에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었겠지만 『밝은 밤』은  내게 시를 액면 그대로 읽을 수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소설 속에서 집은 세상의 가치에서 벗어난 순수의 공간이 아니었고 가족은 더 많은 보살핌과 배려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선택이 아닌 운명으로, 벗어날 수 없는 관계이기에 상처는 더 쉽고 더 크게 덫날 수밖에 없는 듯했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성  4대의 이야기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격변의 역사는 소설에선 먼 산처럼  아웃포커싱 되어 등장한다. 대신 가족이라는 관계와 명분  속에 내면화된 모순과 갈등, 나아가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가 도드라져 드러나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는 진심으로 사과받지 못한 사람들의 나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야. 그저 진심 어린 사과만을 바랄 뿐이야.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연기라도 좋으니 미안한 시늉이라도 해주면 좋겠다고 애처롭게 바라는 사람과, 그런 사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상처도 주지 않았으리라고 체념하는 사람과, 다시는 예전처럼 잠들 수 없는 사람과, 왜 저렇게까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내?라는 말을 듣는 사람과, 결국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다는 벽을 마주한 사람과 여럿이 모여 즐겁게 떠드는 술자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쏟아내 모두를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그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각각 집은 무엇이며 가족은 누구인가? 
우리는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을까?



1. 지연
지연은 이혼을 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남자에게 쉽게 공감했다. 그리고 그런 계기를 만드는데 지연도 기여했을 거라고 상상하고 비난도 했다. 가장 큰 아픔은 가족으로부터 왔다. 

'남자가 바람 한 번 피웠다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된다. 김서방이 받을 상처를 생각해라. 마음을 넓게 먹어야지. 사람들 다 그러고 살아.' 이혼을 결심한 지연에게 아빠가 한 말이었다.
아빠는 딸이 이혼한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 딸의 이혼은 부모를 개망신 시킨 일일 뿐이다.

엄마는 (······) 딸에게 전화를 해서 딸의 이혼으로 엄마가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했다. 심지어 내 전 남편에게 연락해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엄마의 눈에는 딸의 고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김서방은 참 착해.' 엄마는 늘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남자는 여자 때리지 않고 도박 안 하고 바람만 안 피워도 상급에 든다고. 그 이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전남편은 그런 의미에서 엄마에게 착한 남자였다. 그가 바람피운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

혈육 중엔 할머니가 유일하게 지연의 편이 되어주었다. 이혼한 사정을 이야기하자 할머니는 '잘했다'고 말해 주었다. 지연을  대신해서 울어주고 욕해주고 걱정해주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엔 친구 지우도 있다.

'넌 사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그 개새끼는 참 뻔뻔해."
지우는 내 전남편을 개새끼라고 불렀다. (······)
"참신한 욕이 필요해. 분이 풀리는 욕이 필요해." 


지우의  욕설에서 느껴지는 청량감! 
  


2. 엄마
엄마는 어떤 사고로, 지연의 언니였던, 어린 첫째 딸을 잃는다. 참척의 슬픔에 괴로워하는 엄마에게 할머니가 위로의 뜻으로 던진  '사람 명이 하늘에 달렸으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는 말은 칼날이 되어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엄마는 고통 속에서도 남편과 가정을 지켜냈다는 자부심으로 꼿꼿하다. 그리고 꼿꼿함을 딸인 지연에게 투사함으로써 또 다른 상처를 대물림한다.

엄마는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노후가 보장된 부모에 착한 남편,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맞았다. 그것만으로도 내 삶의 복은 차고 넘쳤다.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며 느꼈던 외로움에 대해서, 내게 마음이 없는 배우자와 사는 고독에 대해서, 입을 다문 채 일을 하고, 껍데기뿐일지라도 유지되고 있었던 결혼생활을 굴려나가면서, 이해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감정에는 눈길을 주지 않아야 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 껍데기들을 다 치우고 나니 그제야 내가 보였다.  (······)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지연은 엄마에게 말한다. "세상 바뀌었어, 엄마. 엄마 살던 때랑 지금이 같다고 생각하지 마." 


3. 할머니
증조부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할머니에게 만족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평생 증조부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증조부에게 잘 보이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어 증조부가 권하는 사람을 남편으로 받아들인다. 속내는 남편의 석연찮은 면을 읽어내기도 했지만 증조부의 목소리로 할머니는 생각했다.   '내가 잘난 게 뭐가 있는데.'

남편은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시장에서도, 동네에서도 마음씨 좋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새댁은 좋겠어. 저런 신랑 얻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까. 그래요 저희 신랑이 사람 좋지요. 대답하고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술자리에서 앞장서 술값을 내는 사람. 그리고 그는 그런 사람이기도 했다. 그 모든 지출을 아내의 돈으로 하는 사람. 나중에는 아예 액수를 정해서 그만큼을 미리 마련해달라고 했다. 그는 할머니에게 무엇 하나 주는 법이 없었다. 감정적인 부분에서도 단 한순간도 할머니를 채워주지 않았다. 그 목마른 느낌은 할머니가 증조부와의 관계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증조모의 말이 맞았다. 그는 여러모로 증조부를 닮은 사람이었다. (······)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했다. 그 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만했다. 

어느 날 전쟁통에 헤어졌던 남편의 본부인이 찾아온다. 남편은 일언반구의 사과도 없이 본부인에게로 돌아간다. 할머니는 자신이 낳은 딸도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없었다. 법이 그랬다. 남편과 본부인의 가족으로 등재하고 딸의 양육만 떠안았다. 세상엔 이렇게 이상한 일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대놓고 할머니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가 감쪽같이 속였을 리는 없다면서, 할머니도 분명 그에게 조강지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했으리라는 것이었다. '여자도 잘한 건 없다.' 그것이 사람들의 중론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증조부는 상처를 받고 몸져누워 있는 할머니에게 남편을 잡지 못한 모자람을 꾸짖으며 일장연설을 했다.


- 남자 마음 하나 잡지를 못해서 빼앗겼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그가 쏟아내는 말의 매를 맞았다.
- 그 말 다시 해보시오.
곁에 앉아 있던 증조모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한번 더 그런 말 했다가는 당신 내 손에 죽습니다. 영옥이 한데 그따위 소리 할 거면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입니다.


증조모는 난생처음 자식인 할머니를 위하여 증조부에게 저항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려는 발버둥이기도 할 것이다.

 
4. 증조할머니
증조모의 이름은 이정선이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이름보다 그가 살던 마을 이름 삼천으로 불린다. 그것도 작가의 의도인지 모르겠다. 증조모의 절친인 새비는 아예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혹 내가 간과했을 지도).

증조모는 사회적으로 천시받던 백정의 딸이었다. 증조모의 어머니(지연의 고조할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왜 때리는 거지? 왜 내 남편은 치료도 받아보기 전에 그렇게 빨리 떠난 거지? 어떻게 나와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정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증조부는 일본군에게 끌려갈 위험에 처한 증조모와 결혼하여 증조모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고한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종교적 허영심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증조부는 증조모를 알고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그녀를 끌고 고향을 떠나 개성으로 온 것이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을 몰랐다. (······)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그는 그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을 그녀가 빼앗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부모가 정해준 여자하고 결혼했다면 여전히 그 집에서 좋은 것들을 누리며 살았을  텐데. 자신이 잃은 그만큼을 아내는 보상해야 했다. 그런데 아내는 자신의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감사하는  마음은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여자가 저렇게 뻣뻣하지? 그는 생각했다.
아내에 대한 애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사실 그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강인한 그녀를 동경하면서도 두려워했다. 남편으로서의 일말의 권위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예감했고 , 아내가 속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지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너를 돕기 위해 모든 걸 버렸는데, 왜 그만큼의 대접을 안 해주고 내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거지? 그는 의아했고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는 아내를 그렇게 바라봤다. 본데없이 자라서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증조부가 데려간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심 깊은 바오로가 세례도 받지 않은 여자에게 미쳐서 부모와 고향을 등졌다는 이야기가 개성의 성당에 퍼지지 않을 리 없었다. 증조모는 순진한 남자애를 꼬드긴 죄인이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죄가 있다면 그건 여자로 태어나고 , 여자로 산다는 것이었다.


증조부는 끝끝내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발을 다쳐 피가 배어든 증조모의 버선발을 빤히 보고서도 아프냐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아내의 고통에 일말의 관심이 없었다.  전쟁통 피난길에서도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지연의 할머니)에게조차 양보하지 않았다. 딸이 얇은 외투를 입고 떨어도 자신의 외투를 벗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증조모는 그를 보며 처음으로 체념이라는 걸 배웠다. 


5. 새비 아즈마이와 아재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구원의 인간상이고 증조모와 일생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다. 증조모는 이들을 통하여 위로를 얻고 삶을 지탱하는 힘을 얻는다. (새비 역시 심천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살던 마을 이름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신분을 알고 나면 등을 돌릴까 봐 선수치는 심정으로 꺼낸 증조모의 말에 대답하는 새비의 모습은 너무도 순수하여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 새비는 아시까.
- 뭐를요.
- 내 아바이가 백정이었단 기요.
새비 아주머니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무슨 뜻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 아 ······아즈마이가 고생을 많이 했다구. 아바이가 돌아가시고 혼자 밥 벌어 어마이 모시고 살았다구 들어 알았댔어요.

그들은 증조모가 증조부와 함께 개성으로 나와 살림을 차렸을 때 홀로 남은 증조모의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돌보아준 사람들이었다.  증조모는 마음이 새비 아주머니에게로 기울어서, 그곳으로 기쁨도 슬픔도 안타까움도 모두 흘러갈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한테 기대하는 게 아니라 새비 아주머니한테 기대하며 살았다. 증조모만이 아니라 할머니가 회상하는 새비 아저씨의 모습도 따뜻하기 그지없다. 

학교에서 백정의 딸이라고 놀림을 받고 길모퉁이에서 울다가  새비 아저씨를 만났다. (······) 아저씨는 진짜 천함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천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입에 있다고 했다.
- 영옥이는  씩씩하고 밥도 잘 먹고, 크게 웃고 공도 잘 차고 달리기도 잘하지. 희자랑도 친하구.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
- 아재빈 키가 크구 목도 길구, 항상 웃구 밥도 잘 자시구.
- 듣기 좋구나
- 끝이 아니라요. 아재비랑 있으면 우리 어마이랑 아바이랑 모두 웃구, 새비 아즈마이두 웃구, 희자도 웃구. 아재비가 오기 전이랑 달라요. 아재비는 해 같은 사람이라요 낭중에두 해를 보믄 아재비가 생각날 것 같아요.

- 말하는 거 보라우. 영옥이는 낭중에 시인을 해야걌어.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동안 할머니는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안심이 됐다. 증조부는 할머니가 크게 웃거나 공을 차면 화를 냈지만 새비 아저씨는 그걸 좋게 봐주었다. 새비 아저씨는 일하는 식료품점에서 종종 주전부리를 가져와서 몰래 먹으라고 주기도 했고 할머니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다고, 더 해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 새비 아저씨 곁에 있는 새비 아주머니의 얼굴에도 어느새 살이 오르고 웃음이 어렸다.


6. 위로에 대하여

위로는 어떤 당위의 제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시작된다.
'그랬니, 그랬구나,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하는,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하는,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라고 하는,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기분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밤늦은 해변을 서성일 때 '내게 누군가 있다'라는 믿음을 주는 목소리로 나를 불러주는, '고마워요, 미안해요' 하는 그렇게 아주 단순한 말로 시작하는 진심의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이 갚아지는 것이다. 말은 행동이고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위로는 스스로 구하고 세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연은 이렇게 깨닫는다.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이면서 세 살의 나이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 애들의 손을 잡아 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마지막으로 지연의 말을 빌려  나도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이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 그가 잃은 것은 당신의 사랑이었어.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당신은 패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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