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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화사한 날의 마재

by 장돌뱅이. 2022. 6. 1.


오전까지 전혀 계획에 없다가 아내와 갑자기 의기투합해서  나선 길.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마재.

위대한 학자 다산 정약용과 흑산도 유배 중에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  그리고 약현, 약종의 4형제가 태어난 곳이다.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과 정정혜도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정약종 아구스티노", 아내는 정약종 부인인인 "유소사 체칠리아를 세례명으로 받았다.
코로나를 핑계로 성당에 나가지 않은지 오래된(사실은 그전부터 냉담자)  '무늬만' 천주교 신자지만 그런 인연으로 마재는 늘 머릿속에 있어온 곳이다.


4명의 정씨 형제 중 맏형인 약현을 제외하곤 모두 천주교와 관련하여 유배를 살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특히 정약종 집안의 내력은 놀랍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종과 아들 정철상이, 1839년 기해박해로 부인 유소사,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가 순교했다.
정약종의 첫째 부인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벽의 누이이며, 정 씨 형제의 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다. 또 정약형의 사위가  유명한 황사영 임을 알고 보면 정씨 집안이 천주교와 맺은 인연은 참으로 깊어 보인다.  

마재는 정약종과 그의 가족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천주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역사는 처절했지만 오월의 햇살이 가득한 성지는 밝고 평화로웠다.
'정약종 아구스티노'! 
아무래도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이름을 너무 쉽게 받은 것 같다.
성지를 떠나기 전 잠시 성당에 들렸다.
오래전 이 땅에서 고통받고 숨져간 생령들을 떠올리며 짧은  화살기도를 올렸다. 


근처에 있는 다산유적지에도 들렸다. 정씨 형제의 생가터와 생가 뒤쪽 언덕에 부인과 함께 묻혀 있는 다산의 묘를 돌아보았다. 정약용은 본래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고 10여 년간 신앙생활을 하였으나 신유박해 때 배교를 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후 전남 강진의 유배 생활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의 위대한 저서를 집필하였다.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믿음을 되찾아 중국인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도 젊은 날에는 풍류를 즐기던 젊은이였다. 정약용은 뜻이 맞는 선비들과 "죽란시가(竹欄詩社)"라는 친목모임을 만들고 규약까지 정하였다. 그런데 그 모임 규정이 재미있고 운치 있다.

"살구꽃이 피면 새해 첫 모임을 갖는다. 복사꽃이 피면 꽃에 앉은 봄을 보기 위해 다시 모인다. 한 여름 참외가 익으며 여름을 즐기기 위해 한 번 만난다. 그것도 잠시, 서늘해지기 시작하여 서지(西蓮池)에 연꽃을 완상 하기 위해 또 모인다. 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면 서로 만나 얼굴을 보고 겨울에 들어 큰 눈이 내리면 다시 만난다. 한 해가 기울 무렵, 분에 심어둔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모두 모인다.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가(詩歌)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 그러는 사이 아들을 낳으면 한턱 내고, 벼슬이 승진한 사람도 한턱 내고, 아우와 아들 중에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있어도 한턱내도록 한다. (···) 연화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추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잔을 주고,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 벌 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죽란시사의 선비들은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모여서 서련지에 배를 띄우고 연꽃이 열리며 내는 소리, 개화성(開花聲)을 숨죽여 들었다. 선비들의 그윽하고 청정한 풍류가 그려진다. 서련지는 서대문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모임들이 쇄도한다. '보복 모임'이니 '보복 여행'이니 하는 말도 들린다. 다시 시작하는 모임과 여행에도 죽란시사의 유쾌함과 멋을 흉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다산유적지 가까운 곳에 장어구이로 유명한 감나무집이 있다. 아내와 오래전부터 다닌 '일방적' 단골집이다. 유명세 덕분인지 예전에 비해 식당의 규모도 커지고 반듯해졌다. 오래간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고 푸른 강물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우리들만의 '풍류'를 즐겼다.
날씨가 너무 좋은 탓에 그냥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 충동적으로 떠난 반나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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