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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걱정 없는 날

by 장돌뱅이. 2022. 9. 12.

퇴원은 했지만 아직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거실로 침대를 옮겨 놓았다.
베란다 창문을 통해 시원한 하늘을 누워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가로막는 물건들도 치웠다.
병원의 병실이 '이코노미 클래스'라면 집은 '비즈니스 클래스'라고 아내가 웃었다.

아내의 불운한 사고 뒤 이런저런 잡다한 걱정거리들이 별안간 사라진 듯하다.
오직 한 가지, 아내의 회복으로 집약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까지의 걱정거리들이란 게 별것 아니었단 뜻도 되겠다.
게다가 아내의 회복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니 사실 걱정이랄 게 없는 셈이다.

"내 불꽃은 하늘보기나 걷기일지도 몰라, 나 걷는 거 잘하잖아."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SOUL)』에 나오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그건 목적(불꽃)이 아니라 그냥 사는 거"라고 냉소하지만, 삶을 이끌고 지탱해가는 '불꽃'은 거창한 꿈이나 소망이 아니라 하늘보기나 걷기 같은, 아니면 맛난 기억을 담은 피자와 빵 한 조각, 엄마가 쓰던 실감개, 노랗게 물든 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 긴장했을 때 누군가 건네준 사탕 하나 같은, 평범하고 하찮을 수도 있는 순간을 가슴에 담아두는 데서 시작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사는 건  짜릿한 쾌감이나 성취, 심오한 의미를 담기에 앞서 그냥 사는 일이므로.

이제 '비즈니스 클래스'의 침대에서 하늘보기는 이루었으니 아내와 내게 남은 '불꽃'은 걷기 뿐이다.
아니면 '하늘을 보며 걷기'이거나. 


옥상에 벌렁 누웠다
구름 한 점 없다
아니, 하늘 전체가 구름이다
잿빛 뿌연 하늘이지만
나 혼자 독차지
좋아라!
하늘과 나뿐이다
옥상 바닥에 쫘악 등짝을 펴고 누우니
아무 걱정 없다
오직 하늘뿐
살랑살랑 바람이
머리카락에도 불어오고
발바닥에도 불어오고
옆구리에도 불어온다
내 몸은 둥실 떠오른다
아 좋다!

- 황인숙, 「걱정 많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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