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영화『비상선언』이 불러온 기억

by 장돌뱅이. 2022. 9. 17.


몇 개월 전 시내버스 옆에 붙은 영화 『비상선언』의 포스터를 보고 정치 관련 영화가 아닐까 짐작을 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비상선언"은 재난 상황 발생으로 정상적인 운항이 불가능한 항공기가 무조건적인 착륙을 요청하는 비상사태를 의미하는 항공 용어였다.

『비상선언』에는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김남길, 임시완 등등 이름만으로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해서 뭔가 보여줄 거라는 기대감을 가졌지만 결론은 그다지 '먹을 것 없는 소문난 잔치'였다. 재난영화가 보여주는 상투적인 - 뜻하지 않은 재난에 직면한 이런저런 사연으로 얽힌 사람들이 우왕좌왕 갈등을 키우다가 점차 화해에 이르고, 끝내는 거룩한 인간애로 감동과 눈물샘을 자극하는 - 전개와 결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굳이 인상적인 역할을 꼽아야 한다면(그럴 이유는 없지만) 내겐 승무원 역할을 차분히 해냈던 김소진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래 전의 한 기억이 떠올랐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장길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대략 한 시간이 좀 넘었을까 갑자기 비행기가 제주도로 회항을 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왔다. 미확인 화물이 실린데 따른 안전조치라고 했다. 의아해하는 승객들에게 승무원의 설명이 뒤따랐다. 어떤 승객이 초면인 사람으로부터 중량 초과인 자신의 짐 중 하나를 대신 체크인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침 짐이 별로 없던 승객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화물표는 탑승게이트에서 건네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비행기를 타고 나서 자신이 직접 기내를 둘러봤지만 그 사람을 만날 수 없자 고민 끝에 승무원에게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기내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처럼 저녁에 비즈니스 미팅이 있다는 사람에 연결 항공편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그런 멍청한 짓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언성을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중년의 인도네시아 여성이었다. 한국과 의류 관련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는 그녀는 매우 불안한 기색을 띠며 내게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냈다.
"그 사람은 왜 짐만 건네고 타지 않았을까요?"
"화물 안에는 뭐가 들었을까요?"
급기야 "혹 폭탄이 아닐까요?"
나도 알 리가 없었지만  짐 주인의 탑승 여부와 상관없이 화물은 전수 보안검색이 이루어지므로 위험물이 실릴 리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해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상상력은 멈추지 않았다.
"검색을 통과하는 신형폭탄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그런 폭탄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알 수 없으므로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으려다 그녀의 공포가 너무 진심인 것 같아 안심을 시키고자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 잘못 나가고 말았다.
"누가 코리안 항공기에 테러를 하겠느냐? 그럴 리는 없으니 진정하시라."
그녀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받았다.
"노스코리안 게릴라?"
그녀는 불행하게도 남한에 대한 북한의 '불바다' 발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건 옛날 일이고 지금은 남북이 회해무드라서 북한이 그럴 이유가 없고 테러로 북한이 얻을 이익이 없다고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안심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리고 요즘 말로 '신박한' 상상력을 더하기도 했다. 비행기가 어느 고도 이상으로 올라가면 기압차로 작동하기 시작해서 다시 그 고도 이하로 내려갈 때 터지는 폭탄을 설치한 테러범도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미국 영화에서 보았다고 했다. 할리우드 영화는 이론적으로 가능한 내용을 담는다며 영화 속에서 그런 것은 실제로도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말을 주고받다 보니 은근히 나까지 불안해지기도 했다.

그녀의 우려 속에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안착했다. 창밖으로 부산하게 화물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비행기가 다시 이륙을 했을 때야 비로소 그녀는 테러의 공포에서 벗어난 기색이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영화 속 비행기는 그 임계고도 이하로 내려올 수 없었을 텐데 어떻게 되었지요?"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멕시코의 어느 공항이 고지대에 있어서 그곳에 비상 착륙했어요."

결말이 좀 허무하긴 했지만 왠지 그 영화가 『비상선언』보다 더 나을 것 같다.
그때 제목을 알아두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요즘은 그럴 리 없겠지만 한 때 동남아로 가는 항공 체크인을 하다 보면 갖가지 이유로 화물 운송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긴요한 서류다, 공장이 스톱되어 있는데 가동을 위해 이 부품이 급하게 필요하다, 도착 공항에서 회사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든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등등의 이유를 댔다. 개중에는 정말로 절박한 경우도 있겠지만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급하면 자신들이 직접 가야 한다. 어떤 경로로 화물을 맡았던 그 책임은 부친 사람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롬이  (2) 2022.09.19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2  (0) 2022.09.18
"잘 먹어야 혀."  (2) 2022.09.16
기억에 대하여  (0) 2022.09.14
걱정 없는 날  (2) 2022.09.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