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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기억에 대하여

by 장돌뱅이. 2022. 9. 14.


처음엔 경제대공황 이후 땅을 잃고 새로운 삶이 터전을 찾아 떠도는 가족을 그린 존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와 비슷한 내용의 영화가 아닐까 예상했다. (*지난 글 : 다시 읽다 -『분노의 포도』)
그런데 아니었다. 『노매드랜드』는 2008년 금융 위기로 직장과 집, 심지어 가족까지 잃고 차량으로 떠도는 유랑민을 그리긴 했지만, 그런 상황이 주는 사회적 메시지에 주목하기보다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위로와 기억의 의미를 잔잔하게 드러냈다.

영화는 '잔인한' 내용의 자막으로 시작된다.
"2011년 1월 31일, 석고보드 수요의 감소로 'US석고'는 네바다 엠파이어 공장을 88년 만에 폐쇄했고, 7월엔 엠파이어 지역 우편번호 89405가 폐지됐다."

남편과 함께 이곳에서 평생을 일해온 초로의 여인 '펀'은 회사가 폐쇄된 후, 남편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재도구를 낡은 차량에 싣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길에서 비슷한 사연으로 떠도는 '유목민'들과 만난다.

아름답지만 거친 자연이나 자신들이 필요한 때에만 잠시 거두어주는 거대 자본 구조 속에 왜소할 뿐인 인간들은 서로가 지닌 사연과 상처들을 나누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기억한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황량한 사막에 모닥불을 피우고 샌드위치를 나누고 스스럼없이 담배와 라이터를 건넨다. 깨진 그릇을 접착제로 붙이듯 남루하고 고단한 삶을 공유하며 "I'm not homeless. I'm just houseless. Not the same thing, right?"이라고 되묻기도 한다.

주인공인 '펀'과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간직한 유목민 공동체의 대표인 '밥' 이 나누는 대화가 애잔하면서도 따뜻하다.

"(남편)'보'는 고아였고 우린 애도 없었죠. 나마저 없으면 그가 세상에서 존재했던 흔적이 사라질 거 같아서 거길 떠날 수 없었어요. 그는 엠파이어를 사랑했고 자기 일을 사랑했죠. 사람들도 그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못 떠났죠. 그 마을, 그 집을. 우리 아버진 그러셨죠. '기억되는 한 살아 있는 거다'. 난 기억만 하면서 인생을 보낸 것 같아요, 밥"

"아들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답이 없더군요. 정말 힘들었어요. (···) 그러다 깨달았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아들을 기리는 방법일 수도 있음을. 그 마음으로 매일을 견뎌요. 겨우 버틸 때도 많죠. (···) 이 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예요. 여기서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안 해요. 는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하죠. 그리곤 만나요. 1달 뒤든, 1년 뒤든, 더 훗날이라도. 꼭 만나죠. 난 믿어요. 머지않아서 내 아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걸. 당신도 '보'를 만날 거예요. 그리고 함께였던 삶을 추억하겠죠. "


늘 쏠쏠한 재미와 잔잔한 감동을 주는 픽사(PIXAR) 영화.
『코코』는 2018년 영화로 아내는 어느 여행 중에선가 기내에서 보았다고 했다. 나는 처음이었다.
딸아이가 넷플릭스에 이어서 디즈니를 설치해주어서 이번에 아내와 함께 볼 수 있었다.

멕시코에는 '죽은 자의 날(망자의 날, Dia de Muertos)'이라는 휴무일이 있다.
우리나라 제사와 핼러윈을 합친 행사라고 하면 이해가 쉽겠다. 죽은 자를 기리는 날이지만 엄숙하지 않고 축제 분위기다. 가정은 물론 길거리에도 형형색색 종이와 꽃으로 제단을 꾸미고 특별한 음식을 준비한다. 죽은이들이 집으로 오는 날이라 길에 꽃을 뿌리기도 한다. 미국에서 근무할 때 멕시코 직원들이 '망자의 날' 뒷날 따말레스 같은 음식을 가져와 나누어 먹곤 했다.

『코코』는 '망자의 날'을 소재로 가족 간의 사랑을 그렸다.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화면마다 색상이 강렬하고 화려하다. 죽은 영혼이 저 세상에서 돌아오는 것을 해외여행 시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는 것으로 묘사한 대목은 재미있다. 저승에서 '출국'하는 조건은 살아있을 때 알던 사람들이 죽은이의 사진을 재단에 올려놓고 그의 얘길 하며 기억을 해주는 것이다. 이승에서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죽음의 세계에서도 영원히 사라지는, '마지막 죽음'을 맞게 된다고 영화는 말한다.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니? 심장 깊숙이 총알이 박혔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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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터운 침묵과 허망한 상실만이 존재하는 죽음이라는 (넘사)벽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할 수 일은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은 삶과 죽음이 진실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한 때 우리 사회가 '기록된 역사'와 '기억해야 할 역사'를 구분하는 일에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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