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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추억의 독서 1

by 장돌뱅이. 2022. 9. 24.

온라인 독서모임 "동네북(BOOK)"에서 투표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9월 도서로 선정했다.

 『거꾸로··· 』는 80년대에 처음 읽었다. 세월이 흐른 터라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어떤 '무기'를 얻어내기에 『거꾸로··· 』가 특별히 예리한 시각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독서가 반드시 어떤 '무기'를 득템해야 하는 긴장된 행위일 리 없음에도 왜 그 시절엔 그런 쑥스러운 표현을 썼던 것인지······)

 그리고 이번에 『거꾸로··· 』가 책 선정 후보군에 올랐을 때 그 시절 그런 정도의 '거꾸로'는 이미 일반적인 교양의  '똑바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국정교과서와 신문 방송을 동원해 국민에 주입" 하려는 국가 권력의 역사 해석이나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라는 이념의 색안경"을 쓴 시대착오적인 목소리도 여전히  소란을 피우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책 선정 투표를 할 때 『거꾸로··· 』에 나도 한 표를 더했다.
'무기'와 교양, '거꾸로'와 '똑바로'는 정반대의 표현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 이음동의어라는 판단에서였다. 거기에 "다룬 사건은 거의 같지만 그대로 둔 문장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다시 썼다"고 책을 추천한 회원들의 말도 전면 개정판 『거꾸로··· 』에 대한 궁금증을 부추겼다.  


내가 유시민의 이름을 처음 기억한 것은 1985년 그가 작성했다는 항소이유서를 통해서였다.
당시에 그는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다. 그 시절 시국 관련 재판이란 게 군사정권의 폭력적 탄압을 합법화시켜주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여 젊은 학생들은 재판절차를 무시하거나 아예 재판 거부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항소이유서 역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1심 선고 형량의 과중함을 해소"하려는 것이 아님을 서두에 밝히며 시작하고 있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법과 양심의 상호적대적인 모순관계"가 극명한 현실 속에서 "일시적·상대적인 법"보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양심과 도덕에 따르고자 했던 젊은이의 고뇌를 열정적이면서도 논리적으로 풀어낸 글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오며 비슷한 나이였던 나의 존재를 부끄러움으로 돌아보게 했다. 

본 피고인은 지금도 자신의 손이 결코 폭력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변함없이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들의 고난을 슬퍼하며 을씨년스러운 법정 한 귀퉁이에서, 기다란 구치소의 담장 아래서 눈물짓고 계신다는 단 하나 가슴 아픈 일을 제외하면 0.7평의 독방에 갇혀 있지만 본 피고인의 마음은 늘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빛나는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 설레던 열아홉 살의 소년이 7년이 지난 지금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배처럼 비난받게 된 것은 결코 온순한 소년이 포악한  청년으로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가 '가장 온순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내는' 부정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본 피고인이 지난 7년 간 거쳐온 삶의 여정은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대학생들이 공유하는 보편적 경험입니다. (···)  모순 투성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나라를 사랑하는 본 피고인은 불의가 횡행하는 시대라면 언제 어디서나 타당한  네크라소프의 싯귀로 이 보잘것없는 독백을 마치고자 합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거꾸로··· 』에는 유시민이 선정한 20세기의 굵직한 사건 11개와 "달라진 세상에 대한 소회"를 담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나로서는 전 세계에서 우리를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게 한 한국전쟁도 2차대전의 전후 처리와 강대국들의 냉전이 불러온 '대리전쟁'이라는 의미에서 한 장을 차지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1. 드레퓌스 사건 : 20세기의 개막
2. 사라예보 사건 : 광야를 태운 한 점의 불씨
3. 러시아 혁명 : 아름다운 이상의 무모한 폭주
4. 대공황 : 자유방임 시장경제의 파산
5. 대장정 :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의 신화
6. 히틀러 : 모든 악의 연대
7. 팔레스타인 : 눈물 마르지 않는 참극의 땅
8. 베트남 : 마지막 민족해방전쟁
9. 맬컴 엑스 : 검은 프로메테우스
10. 핵무기 : 에너지의 역습
11. 독일 통일과 소련 해체 : 20세기의 폐막
12. 에필로그 : 알 수 없는 미래

『거꾸로··· 』를 읽으며 나도 같은 사건의 이해를 위해 오래전에 읽은 몇 권의 책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기억들은 여행기에 혹은 일상의 짧은 단상들에 스며들어 있기도 했다. 『거꾸로··· 』 와 더불어 떠나게 된 '추억의 독서 여행기'를  다시 좀 더 적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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