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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추억의 독서 2

by 장돌뱅이. 2022. 9. 25.

한길사(1978)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에서 있었던 간첩조작 사건이다. 
1894년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는 군사기밀을 누설한 죄로 체포된다.  독일대사관에 보내진 기밀문서의 필체와 드레퓌스의 필체가 같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다른 추가 증거는 없었다. 군부는 허위 필적 감정서와 가짜 증인을 내세웠고 군사 법원 판사와 배심원들에게 조작한 문서를 보여줬다. 변호인의 증거 공개 요구는 국가안보에 중대한 기밀이라고 거부했다. 드레퓌스는 마침내 군적 박탈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한 번도 자신의 혐의를 시인하지 않았다. 

재판을 하기 전부터 언론은 드레퓌스의 반역을 기정사실화했다. 드레퓌스를 '프랑스군 장교'가 아닌 '유대인 대위'라 불렀다. 유럽 사회에  퍼져 있는 반유대주의 정서를 언론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드레퓌스의 군적 박탈 행사에는 성난 군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욕설과 주먹질과 돌팔매를 받으며  드레퓌스는 남아메리카 기아나의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객관적 증거와 함께 명백한 진범이 드러났다. 군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았다. 군사법원은 진범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기까지 했다. 드레퓌스의 재심 문제가 부각되었다. 프랑스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왕정복고파, 옛 귀족, 군부,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 보수 성향 정치인, 군국주의자 그리고 무엇보다 신문이 재심에 반대했다. 재심 요구는 군부와 국가를 파멸시키려는 유대인 국제조직의 음모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군의 위신과 사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재심을 요구한 쪽은 소수의 저명한 지식인과 법률가, 공화주의자와 진보 성향 정치인, 몇 안 되는 신문이었다.

작가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며 재심 요구에 힘을 실었다. 그는 드레피스에게 유죄를,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한 군사재판을 호되게 꾸짖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으며,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획득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것입니다.

재심 반대 세력은 준동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드러나는 드레퓌스의 결백의 증거들을 인정하는 대신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이자!" "군대 만세!"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유대인을 폭행하고 유대인 상점을 부쉈으며 졸라의 집에 돌을 던졌다. 군부는 드레퓌스의 재심 요구를 주장한 군인을 퇴역시키고 대학은 같은 이유로 교수를 해고했다. 법원은  졸라에게 군대 비방의 죄로 벌금형을 선고했다. 하원 선거에서 재심 요구파 의원들은 거의 다 낙선했다.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을 해야 했고 법원은 궐석재판을 열어 그에게 명예훼손죄로 구류 1년 형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재심이 열렸다. 첫 재판이 있은지 5년 만이었다. 군부의 거짓은 여전했다. 드레퓌스의 변호사는 법원으로 가는 도중 총을 맞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재판정에는 갈 수 없었다. 법원은 다시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정상을 참작해' 형량을 10년으로 줄여줬다. 그리고 10일 후인 1899년 9월 19일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에게 드레퓌스의 잔여 형량을 면제하고 군적 박탈을 취소하라는 특별사면을 내렸다. 특별사면을 받아들이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하면서도 사면을 받아들였다. 몇 개월 후 드레퓌스와 연관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한 일괄 사면이라는 정치적 타결이 이뤄지면서 드레퓌스를 반역자로 조작한 범죄자들도 똑같이 사면을 받는다.

1906년 7월 12일 드레퓌스가 신청한 재심에서 법원은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서 드레퓌스 사건은 법률적으로 종결되었다. 공개하면 독일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군부가 주장했던 기밀문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건의 진범이었던 에스테라지는 어떤 소용돌이에도 휘말리지 않고 영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1923년 사망을 했다. 드레퓌스는 1935년 7월 숨을 거두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불완전하고 미숙했다. 제도는 이미 훌륭했지만 의식과 문화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면서 프랑스 국민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깊이 체득했다. 재심 요구파가 싸움을 시작한 것은 처음부터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었기 때문은 아니다. 군사법원이 합법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위반하면서 유죄를 선고한 것이 발단이었다.

언론의 중요성 또한 드레퓌스 사건을 겪으면서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언론은 입법부·행정부·사법부 못지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제4부'가 됐다.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언론이 꾸준히 보도하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이 된다.
지식인의 사회적 영향력도 언론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무엇보다 사랑과 연대,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 드레퓌스 사건을 관통하는 진실이었다.

드레퓌스 가족은 서로 믿고 사랑했다. 그 사랑과 믿음으로 참혹한 불운과 시련을 이겨냈다. 반전을 거듭한 주인공들,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려고 부당한 비난과 박해를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의 향기를 풍긴다. 모든 것을 걸고 진실을 드러낸 피카르 중령, 지성과 열정의 화신 졸라, 끝까지 책임을 다한 클레망소, 언론의 선동과 반유대주의자의 집단 광란을 이성의 힘으로 이겨낸 시민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허물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심 요구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연대한 세계의 지식인들, 그들은 인간이 어리석고 때로는 기괴하지만 지적 재능과 선한 본성을 지닌 존재임을 증명했다.

 *이상 『거꾸로 읽는 세계사』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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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신 말기 한길사에서 나온 위 사진 속 책(『드레퓌스 - 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만났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폭압적으로 제한하고 걸핏하면 국가안보, 국민총화라는 집단 논리를 앞세우던 시절이었다. 그 책 속에서 읽은 정치인 클레망소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마치 우리 사회를 향한 꾸짖음 같았다. 통쾌하면서도 서글펐다.

국가 이익 - 그것이 법을 위반할 힘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법에 관해 말하지 말라. 자의적인 권력이 법을 대신할 것이다. 오늘 그것은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이며, 국가 이익은 이성을 잃은 채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 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이다. 정권이 국가이익을 내세우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 사람의 차이를 허용하지 않고 차이를 감내하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드레퓌스에게 적용된다면,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적용될 게 분명하다. 새 시대의 동이 터올 때, 대혁명이 보인 첫 행동은 국가 이익의 저 거대한 요새, 바스티유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보인 검사의 모습 또한 『드레퓌스 ···』를 읽던 시절 우리 사회의 그들과 닮아 있었다.

검사가 논거로 삼은 것은 자기의 논리뿐이었다. 그는 드레퓌스의 필적과 명세의 필적에 차이가 있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드레퓌스가 다른 필적을 가장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드레퓌스의 집을 뒤지고 그의 전력을 샅샅이 조사했는데도 역시 별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 것은 드레퓌스가 범죄를 은폐하는 데 천재적인 조심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드레퓌스가 지루한 심문 과정에서도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가 영리할 뿐 아니라 초범죄자적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검사는 주장했다. 보통의 범죄자라면 경찰에서 심문을 당하면 양심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드레퓌스는 이런 양심이 결핍돼 있는 도덕적 불구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위기의 민주주의 - 룰라에서 탄핵까지』에 나온 검사의 모습은 드레퓌스 검사와 판박이었다. 하급 노동자 출신으로 브라질의 대통령이 된  룰라는 2002년부터 8년간의 재임 기간 동안 경제를 살리고 빈민을 위한 복지정책과 토지개혁을 통해 국민의 삶을 향상시켜 퇴임시까지 80%가 넘는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수구 기득권 세력은 퇴임 후 룰라를 부패 혐의로 구속한다. 아파트 한 채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이다. 검사는 법정에서 "아파트의 소유자가 룰라라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진짜 소유관계를 숨겨 놓았다 것"이라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이른바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바로 증거'라는 논리는 시대를 관통하고 모든 나라에서 공유되는 그들만의 노하우인 것 같다. 그 연방 검사는 룰라를 이은 진보적 성향의 호세프 여성 대통령을 사법 쿠데타로 탄핵시키고  들어선 보우소나르 극우 정권에서 법무장관이 된다. 검찰과 언론과 기업가들의 카르텔이 만들어낸 브라질의 위기······ 우리는 어떤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드레퓌스 ···』에 나온 클레망소의 말을 한번 더 인용해 본다.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뚜렷한 인권을 발견했으며,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나라란 땅과 바위와 하천, 삼림, 전답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마음을 한데 묶고 사람들의 행동을 알리며 문명된 세계에 그것이 영향력을 좌우하는 이념으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억압, 승자와 패자의 모든 상태에서 근대 프랑스는 전 인류를 위한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뚜렷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  그 정의가 우리나라에서 의미 없는 빈말이 되었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으며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 적에(···)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 적에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 위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 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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