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집이 추워요?" "아빠가 다니던 탄광을 그만두게 되어서 석탄 살 돈이 없어." "아빠는 왜 탄광을 그만두었어요? " "석탄을 너무 많이 캐서 석탄이 남아돈대."
자본주의는 기업 이윤이라는 단 하나의 최우선적 동기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황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 경제학에 무지한 나는 검증할 능력이 없다. 모든 경제 주체의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지면 정부가 개입하지 않아도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가장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해 준다는 '보이지 않는 손'이 1929년의 미국 경제에 얼마나 작용했는가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그건 전문가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불경기 또는 공황이 닥칠 것이라고 예측한 이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1929년 10월 24일에 시작된다거나 그토록 오래 이어지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다. 대공황이 끝난 뒤에도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못했다. 미국 정부의 금융 정책 실패, 여러 우발적 사건의 중첩, 시장 경제의 구조 결함 등 여러 일리 있는 분석이 나왔지만 어느 것도 대공황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중에서 -
예측을 할 수 없었고 원인은 알 수 없어도 결과는 안다. 주식시장이 붕괴되자 5,000여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고 돈을 조달하지 못한 사업체는 도산했다. 산업 생산은 50% 하락했고 , 약 1,500만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이 실직상태가 됐다. 1929년 봄에 당시 12망 8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던 포드 자동차는 1931년 8월에 이르면 3만 7천 명 만이 남게 되었고, 뉴잉글랜드 섬유공장의 28만 노동자 가운데 거의 절반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대도시 빈민구호소 앞에 길게 늘어선 실업자들은 돈만 없었던 게 아니다. 자존감도 가족을 볼 낯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잃어버렸다. 일자리를 달라고 시위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조종한다며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중에서 -
『분노의 포도』는 경제공황기에 집과 땅을 잃고 떠도는 가족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소설이다.
쫓겨난 사람들과 이주자들 25만 명, 30만 명이 캘리포니아를 향해 줄지어 갔다. 그들 뒤에서는 새로운 트렉터들이 농토 위를 움직이고 소작인들은 쫓겨나고 있었다. (···) 어딘가를 응시하는 위험한 사람들의 물결이었다. (···) 그는 황금빛 오렌지가 나무에 달려 있는모습을,작은 황금색 오렌지가 진녹색 나무에 달려 있는 모습을, 가격이 떨어지면 쓰레기처럼 내다 버릴 오렌지를 야윈 아이에게 주려고 하나라도 따는 사람이 있는지 지키기 위해 엽총을 든 채 이랑 사이를 순찰하는 경비원들을 보았다.
5. 대장정 90년 대 초 '드디어'중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드디어'라고 한 것은 그때까지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중국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책은 대략『전환시대의 논리』과 『우상과 이성』을 비롯한 이영희 교수의 여러 저작 - 『8억인과의 대화』, 『10억인의 나라』, 『중국백서』- 을 기본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상협 교수의 『모택동사상』,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님웨일즈의 『아리랑』, 그리고 연변 소설가 김학철의 단편과 장편 소설, 자서전 등이었다.
우리와는 다른 무엇이 조금은 있지 않겠는가 하는 약간의 기대를 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하이나 베이징 같은 같은 대도시에서도 비효율적인 제도가 실생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어긋남이 느껴졌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에게는 전혀 다른 환율의 태환권(FEC)을 사용하게 했다. 그래서 늘 비공식적인 경로로 달러를 인민폐로 바꾸어야 했다. 철밥통(铁碗) 관료들의 몸에 밴 형식주의와 부패는 사회 전반에 남아 있었다. 한 번은 비행기 연결이 안 되어 예약 없이 호텔 투숙을 하려고 찾아갔다가 빈 방은 있지만 예약을 하지 않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프런트의 직원은 불과 10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호텔 로비의 공중전화로 먼저 예약을 해달라고 사무적이면서도 친절한(?) 안내를 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고 다시 프런트로 다가가자 그 직원은 비로소 예약이 되었다고 방 키를 내주었다.
그 이후 중국으로 여러 번의 업무 출장과 가족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현지에 공장 설립과 관리를 하면서 중국에 대한 선망은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로 선을 긋게 되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다음과 같은 평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국공산당이 지배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청, 군벌정권, 장제스의 국민정부 시대보다 나은 사회였다는 것은 반박할 여지가 없다. 중국공산당은 인민을 먹여 살렸고 봉건적 폐습을 일소했으며 제국주의의 간섭과 수탈을 뿌리쳤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중국공산당도 소련공산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구축해 사상과 이념의 다양성을 봉쇄하고 입법·행정·사법권을 하나로 묶어 권력을 접종했으며 권력자의 임기를 실효성 있게 제한하지도 않았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차르'가 된 것처럼 마오쩌둥도 '사회주의 황제'가 됐다. 국가경제와 인민의 생활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개선하지도 못했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일은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내전에서 이기는 것과는 다른 사업이었다. 마오쩌둥은 그 사업을 할 분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권한을 넘기지도 않았다. (···) 중국 경제는 중앙통제 방식의 계획경제와 분권적 경제 시장 경제를 혼합한 체제다. 오늘날 중국 국민의 삶은 사회주의 이념이 아니라 부를 향한 열망이 지배한다. 빈부격차는 여느 자본주의사회 못지않으며 공직사회의 부패는 어떤 자본주의사회보다 심하다. 마오쩌둥과 대장정의 전사들은 이런 세상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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