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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추억의 독서 6

by 장돌뱅이. 2022. 9. 28.

7. 팔레스타인

꼬일 대로 꼬여 좀처럼 해법이 없어 보이는 중동 분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원에 강대국의 책임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차 세계 대전 와중이었던 1915년 7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영국의 외교관 헨리 맥마흔은 아랍의 정치·종교 지도자 후사인에게 아랍인이 영국과 함께 오스만제국과 싸우면 전쟁이 끝난 후 아랍 독립국가 수립을 지원하겠다는 문서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1917년 11월에는 외교장관 벨푸어가 유대인의 협력을 얻어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영국의 이런 모순된 행동으로 팔레스타인에는 분쟁의 불씨가 심어지게 된 것이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폭력과 그 폭력을 방조하는 강대국들의 이기심이 더해진 것이 오늘의 중동 문제의 핵심이다.  

이스라엘 건국은 곧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략이었다. 유럽 유태인은 2천 년 동안 혹독한 차별과 박해를 받았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본 유럽 미국의 기독교인과 정부가 시오니즘 운동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인 사정도 이해할 만하다. 자신의 국가를 세워 안전한 삶을 도모하려 한 유대 민족의 동기도 정당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거기에 살던 사람들을 내쫓을 권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모든 민족이 수천 년 전 조상이 한때 살았다는 이유로 남이 사는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폭력을 행사한다면 세계는 당장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그곳에서 땅을 경작하고 자손을 낳고 나름의 역사와 문화를 일군 아랍인의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호소하고 설득하고 협력을 구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원주민을 내쫓았다.

(···) 제국주의 시대가 저물고 아랍 민중이 민족 정체성과 자주성에 눈을 뜬 그 시기에 시온주의자들이 저지른 학살과 파괴 행위를 정당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 집단을 폭력으로 내쫓고 자기 나라를 세운 침략적 민족주의였다. 그들이 한 일은 수천 년 동안 유대인을 부당하게 차별하고 박해하고 학살한 유럽 기독교인의 행위와 다르지 않았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

1979년 발행

시온주의 무장 세력 지도자(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유대 군대를 지휘하며 1948년 3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 마을을 초토화하고 주민들을 사살했다. 동유럽 점령지의 유대인을 마을 단위로 학살한 나치 친위대 못지않은 잔인한 범죄였다.

유대 군대는 "1947년 12월부터 산비탈에서 드럼통 폭탄을 굴려 내려보내고 도심에 박격포를 쏘았다. 영국군이 하이파에서 물러난 1948년 4월 21일에는 도심을 집중 폭격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아랍인에게 총을 쏘았으며 불에 타는 모든 것에 방화했다. 하이파 주민들은 물에 뜨는 것은 무엇이든 붙잡고 항구를 탈출했다. 밟혀 죽거나 버려진 아이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소설 「하이파에 돌아와서」에서 아랍인 부부는 낳은 지 5개월밖에 안 된 아들을 집에 두고 유대 군대에 내몰려 하이파를 떠나게 된다. 20년 만에 이스라엘 군이 폐쇄했던 국경을 개방하여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들은 유대인 부부에 입양되어 이스라엘 군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생부 생모를 질타한다.

"당신들은 하이파를 떠나지 않아야 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할 수 없었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젖먹이애를 침대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또 불가능했다고 하신다면, 뻔뻔스럽게 이 하이파에는 돌아오지 말아야 했습니다. 당신은 그것도 또 불가능했다고 하시겠습니까? 20년이 지났는데도, 20년이. 그동안 당신의 자식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만약 내가 당신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내 자식을 위해 무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무기보다 더 나은 수단이 있습니까? 참 무력한 사람들이군요! 정말 무력한! 무거운 쇠사슬에 묶여서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놈의 진보 따위가 있겠습니까. 20년간, 당신은 20년 간, 눈물로 지내셨다! 그것이 지금 당신이 하고 싶은 말입니까? 그것이 당신의 쓸모없는 무디고 낡아빠진 무기인가요? "
-위 사진의 책 중에서 -

아들의 비난은 그대로 이스라엘이나 이른바 '중립'을 자처하는 자들의 시각을 드러낸다.
그것은 '눈물'로밖에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2차 공격이다.
아버지는 대답한다. "우리는 비겁자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점에서 자네는 옳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네에 대해서 하등 정당화될 수는 없다. (···)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치가 유대인에게 가했던) 아우슈비츠의 일도 정당한 것이 되니까."

아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유대인 부부에게서 자란 아들의 모습은 그가 원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진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것은 유대인은 절대불변의 유전자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유대인을 단일한 '민족 집단'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스라엘 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라고 한다. 우리의 단일민족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듯 유대인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이파에 돌아와서」를 쓴 갓산 카나파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절제된 구성과 언어로 표현'한 아랍 세계의 대표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제1차 중동전쟁 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이며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PFLP)의 대변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36년에 태어나 1972년 7월 8일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차량에 설치해 놓은 폭탄에 폭사했다.

얽힌 팔레스타인 문제의 실타래를 단번에 풀어낼 방법은 없지만 원칙은 있다.
그것은 가해자의 회개와 사과에서 시작되는 평화다. 

평화로운 공존을 원한다면 가해자인 이스라엘 정부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 민중들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어줄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럽에서 수천 년 동안 당했던 박해와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돌아보며 느끼는 감정을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떠안겼다. 그 점을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공존에 대한 합의를 얻어내지 않는 한, 유대 민족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평화와 안전을 누리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 『거꾸로 읽는 세계사』 중에서 -


세계적인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국적의 유대인이다.
그는 1999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이스라엘과 아랍 지역의 14∼25세 연주자들을 모아    '웨스트이스턴 디반 (West-Eastern Divan 괴테가 민족 간 화합을 역설한 '서동시집(西東 詩集)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나치의 집단수용소 부헨발트 근처에서 첫 연주회를 한 이후, 2005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팔레스타인의 임시 행정 수도  라말라에서 공연을 했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화해의 시작'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은 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의 씨앗을 심고 화해와 연대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명예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이스라엘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울프상" 수상하고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바렌보임은  이스라엘의 독립선언문을 인용한 후 이렇게 말했다.

" 남의 땅을 점령하고 그 국민을 지배하는 것이 이스라엘 독립선언문의 정신에 부합할까요? 독립이라는 미명 하에 다른 나라의 기본권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요? 우리 유대 민족이 고난과 박해의 역사를 겪었다 해서 이웃 국가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그들의 고통을 모른 척하는 것에 면죄부를 얻은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쟁 해결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십니까?  사회정의에 입각해 실용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분쟁을 해결하는데 군사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전략적으로도 그렇죠. 그러므로 이젠 대안을 찾을 시기입니다. 전 제 자신을 꾸짖습니다. 왜 진작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못했던가."

이스라엘 대통령이 직접 시상을 한 자리였다. 그에게 즉각적인 비난이 쏟아졌음은 물론이지만 그는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넘겼다. 그는 2011년 8월 웨스트이스턴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예술의 전당과 임진각 평화누리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유튜브에는 그의 공연 영상이 많다. 그중에 하나를 올려본다.

Beethoven Sonata N° 25 Daniel Barenbo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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