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베트남
1945년 9월 2일 :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1946년 12월 19일 : 제1차 베트남전쟁.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파견해 괴뢰정부를 세운 프랑스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
(1954년 8월 1일까지 이어짐)
1954년 3월 13일 : 베트남 북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과 벌어진 전쟁(5월 7일까지)
프랑스 군 패배, 7월 21일 양국은 '제네바 휴전 협정'을 맺음
1964년 8월 4일 : 통킹만 사건, 미군 북폭 개시.
미군+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 시작
1975년 4월 30일 : 사이공 함락.
1976년 7월 2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수립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새삼스레 길게 재론한 필요는 없겠다.
150만 명의 전투원과 110억 달러 이상의 전쟁 비용을 들이고, 6만 명의 전사자와 15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도 미국은 패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이렇게 말했다.
1964 ∼ 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소설가 방현석은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미국이 베트남에 패배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정글 때문도, 거미줄처럼 얽힌 땅굴 때문도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옳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보다 백 배는 옳고 천 배는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가 최후로 내세우는 미덕인 그 잘난 전우애보다 베트남 사람들의 동포애가 만 배는 더 뜨거웠기 때문이다.
베트남 군대를 창설하고 베트남 인민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보 우옌 지압(VO NGUYEN GIAP)은 베트남 전쟁에는 "명확한 전선의 개념이 없었다. 전선은 바로 적이 있는 그곳에 있다. 전선은 아무 곳에도 없었으며 어디에나 있었다. 고정된 분계선은 없으며 적이 발견되는 모든 곳이 전선"이라고 했다. 미군은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의 뒤에서 공격하는 무장 대중의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과 군대 사이의 신의와 사랑, 완벽한 상호 이해'를 나누고자 하는 '조직화된 인간'을 전제로 한 발언이었다. (베트남 군의 '영예의 서약'에는 이를 위해 '인민을 존중할 것, 인민을 도울 것, 인민을 수호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6가지 금지사항 중에는 '인민의 신조나 관습을 공격하지 말라'는 항목도 있다.) 미군 병사들은 익숙지 않은 지형과 기후에 전쟁의 명분도 확신하지 못한 채 낯선 땅에 와있을 뿐이었다.
70년 대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있었다면 80년 대엔 『사이공의 흰 옷』이 있었다.
『사이공의 흰 옷』은 1960년을 전후하여 사이공을 무대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한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실제 인물 구엔 치 차우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책 뒤표지에는 그녀를 기리는 시도 적혀 있다.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다발의 비라, 몇 장의 신문이
감쪽 같이 감춰진 가방을 껴안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작은 파랑새처럼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사이공 거리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 레 아인 수앙의 시, 「흰 옷」 중에서 -
한 때 우리에게도 익숙했던 '피세일'을 나가는 장면이다.
큰 감동까지 받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젊은이들의 생활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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