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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추억의 독서 7

by 장돌뱅이. 2022. 9. 29.

8. 베트남

1945년 9월 2일 :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1946년 12월 19일 : 제1차 베트남전쟁.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파견해 괴뢰정부를 세운
 프랑스에 대항하여 벌인 전쟁
                    (1954년 8월 1일까지 이어짐)

1954년 3월 13일 : 베트남 북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과 벌어진 전쟁(5월 7일까지)
                     프랑스 군 패배, 7월 21일 양국은 '제네바 휴전 협정'을 맺음
1964년 8월 4일 : 통킹만 사건, 미군 북폭 개시.
                      미군+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 시작

1975년 4월 30일 : 사이공 함락.
1976년 7월 2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수립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새삼스레 길게 재론한 필요는 없겠다.
150만 명의 전투원과 110억 달러 이상의 전쟁 비용을 들이고, 6만 명의 전사자와 15만 명의 부상자를 내고도 미국은 패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이렇게 말했다.

1964 ∼ 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 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소설가 방현석은 이렇게 적은 바 있다.

미국이 베트남에 패배한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정글 때문도, 거미줄처럼 얽힌 땅굴 때문도 아니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옳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백분의 일에도 못 미치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미국보다 백 배는 옳고 천 배는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가 최후로 내세우는 미덕인 그 잘난 전우애보다 베트남 사람들의 동포애가 만 배는 더 뜨거웠기 때문이다.

베트남 군대를 창설하고 베트남 인민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보 우옌 지압(VO NGUYEN GIAP)은 베트남 전쟁에는 "명확한 전선의 개념이 없었다. 전선은 바로 적이 있는 그곳에 있다. 전선은 아무 곳에도 없었으며 어디에나 있었다. 고정된 분계선은 없으며 적이 발견되는 모든 곳이 전선"이라고 했다. 미군은 "어디를 가더라도 자기의 뒤에서 공격하는 무장 대중의 바다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중과 군대 사이의 신의와 사랑, 완벽한 상호 이해'를 나누고자 하는 '조직화된 인간'을 전제로 한 발언이었다.
(베트남 군의 '영예의 서약'에는 이를 위해 '인민을 존중할 것, 인민을 도울 것, 인민을 수호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6가지 금지사항 중에는 '인민의 신조나 관습을 공격하지 말라'는 항목도 있다.) 미군 병사들은 익숙지 않은 지형과 기후에 전쟁의 명분도 확신하지 못한 채 낯선 땅에 와있을 뿐이었다.

70년 대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 있었다면 80년 대엔 『사이공의 흰 옷』이 있었다.
『사이공의 흰 옷』은 1960년을 전후하여 사이공을 무대로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한 여학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실제 인물 구엔 치 차우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책 뒤표지에는  그녀를 기리는 시도 적혀 있다.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다발의 비라, 몇 장의 신문이
감쪽 같이 감춰진 가방을 껴안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작은 파랑새처럼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사이공 거리
여기저기를 날아다닌다

- 레 아인 수앙의 시, 「흰 옷」 중에서 -

한 때 우리에게도 익숙했던 '피세일'을 나가는 장면이다.
큰 감동까지 받지는 않았지만 베트남 젊은이들의 생활을 조금 엿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어린 시절 '베트콩'은 '북괴'에 버금가는 악마였다.
그들의 만행과 '정의의 심판'을 그리는 만화와 뉴스, 노래가 넘쳐났다. 

 

2005하노이1 - ‘묵사발’의 하노이로 가며

묵사발이란 말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이 말은 “묵을 담는 그릇”의 의미로 쓰는 경우보다는 “심한 타격을 받고 사물이 몹시 일그러지거나 망가진 상태”를 일컫는 의미로 더 자주 쓴다. 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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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호지명은 김일성과 모택'똥'과 함께 그 시절 '악의 축'이었다.

 

2005하노이3 - “베트남의 별” 호치민(胡志明)

'베트남의 별’이란 표현은 프랑스인 쟝 라꾸뛰르 JEAN LACOUTURE라는 사람이 쓴 『호치민』의 한국어 번역판 제목이다. 여행기의 제목으로 인용하고 보니 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비현실적인 거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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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의 시각을 교정해 준 건 친구들이었고 책이었다.

 

2019 호치민1 -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

베트남 호치민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책꽃이에서 베트남 관련한 책들을 꺼내 보았다. 여행 안내서를 빼곤 주로 젊은 시절에 읽은, 주제가 한결 같이 베트남 전쟁에 관련한 책들이었다.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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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비전투병을 처음 파견한 1964년 9월부터 마지막 부대가 철수한 1973년 3월까지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했다 5천여 명이 전사하고 10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된 참전 군인들은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대한민국은 1992년 베트남과 외교관계를 맺었고 2015년에는 자유무역협정을 발효했다. (···)그러나 역사의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베트남의 참전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참전 군인과 가족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니다. 용맹하기로 명성이 높았다는 '따이한 부대'가 그토록 많은 사상자를 냈다면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들고 싸운 해방 전선의 손실은 얼마나 컸겠는가. 한국군은 퐁니·퐁넛사건과 같은 양민학살을 다른 곳에서도 저질렀고 베트남 여성이 낳은 한국계 자녀를 모두 버리고 철수했다. 베트남 전쟁의 상처는 어디까지나 '가해자'로서 입은 것이었다.
그 문제를 덮어두고 한국과 베트남의 우호관계를 말하는 것은 남과 자기 자신을 모두 속이는 일이다. 그런 식이라면 합리화하지 못할 죄악이란 없다.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가리켜 '제국주의 시대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불가피하게 일어난 불행한 일'이라거나 '좋은 미래를 위해 어두운 과거를 얼른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하는 일본 우익과 다를 바 없다. 베트남에 파병한 덕에 우리 기업이 사업 기회를 잡았고,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로 산업화를 성공시켰으니 잘된 일이라고 한다면, 정당화할 수 없는 침략전쟁은 없을 것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중에서-

80년 5월 광주에서 끔찍한 한낮의 살육이 일어날 수 있었던 데는 한국 전쟁으로 내면화된 일상적인 폭력이 베트남 전쟁으로 심화되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가능하다면 빨리 사과와 용서를 구하여 역사적 부채를 정리하는 게 서로를 위하여 최선의 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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