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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미국

샌디에고 걷기2 - 티후아나 강변

by 장돌뱅이. 2012. 5. 21.

지난 봄 한국 방문 기간동안 아내는 갑작스럽게 수술을 받게 되었다.
건강검진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수술 직후 의사는 아내에게 하루에 한 시간 정도의 걷기를 지시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아내는 이런저런 주사병과 줄을 매단 채로
매일 병원 복도를 걸었고 퇴원을 하여 집에서 몸조리를 하면서도
방과 거실 왕복하며 걷기를 계속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오는 아내에게 주어진 숙제도 골프와 수영 대신에 걷기였다.
걷는다는 일은 생활을 유지하는 기본일 뿐만이 아니라
재활 치료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인 것 같았다.


*위 사진 : 샌디에고 티후아나 강 어귀의 광활한 초원지대

아내가 오기 전 나는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한 시간 이내의 짧은 트레킹 코스를 조사해 두었다.
조사를 하면서 샌디에고에는 콘크리트 일색인 우리의 대도시와는 달리
다운타운을 제외하고는 동네와 동네 사이에 자연 그대로의 푸른 녹지가
적절히 남아 있어 가벼운 걷기나 달리기를 하기에 적절한 곳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설혹 아내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하더라도 그 길들은
한번쯤 걸어보아야 가치가 있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달기기나 가벼운 산책을 산책을 할 수 있는
최소한 세 가지 코스를 집 주변에 개발해두라고 자주 권하는 편이다.
저마다의 체력을 기준으로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긴 코스를 정하고
그때 그때 적당한 거리를 택해 걸어보라고.  

인류의 많은 업적들이 산책을 통해서 나왔다는 거창한 사실이나
미용이나 건강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어린 아이들을 앞세우고
아내와 천천히 아름다운 길을 걷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별로 없다는 나의 생각 때문이다.

푸른 하늘에 뜬 흰 반달과 저무는 저녁의 붉은 노을,
바람이나 구름에서부터
허공을 가르는 새들의 날개짓이나
보이지 않는 곤충들의 울음소리,
팔랑이는 나뭇잎과 흐른 시냇물 같은,
세상에 널린 그 무수한 보석들이
눈과 귀로 잦아들어 마음 속 깊은 곳에
오붓하게 퇴적 되는 시간이 걸음걸음에서 생겨난다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믿고 느끼게 되었다.
한마디로 걷는 일은 축복인 것이다.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 지역을 흐르는 티후아나강 TIJUANA RIVER은
태평양과 만나기 직전 강으로서의 마지막 숨을 길게 풀어놓는 듯
3백만 평의 광활한 습지와 평야를 거느리게 된다.
초원지대인 그곳은 수많은 철새들을 비롯한 여러갖 동식물들의  
보금자리여서 국립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 들을 가르며 나 있는 TIJUANA ESTAURY TRAIL에서
아내와 척 걷기를 시작했다. 한시간 정도의 평평한 길이어서
수술과 시차로 기운이 떨어진 아내에게 적합한 코스라고 생각했다.

집 주변 가까운 곳의 걷기.
그것은 아내와 내가 만드는 작은 여행이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익숙치 않은 환경과 시간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것이 여행이라면
그것이 반드시 좌석에 몸을 묶고 먼곳으로 날아가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게 가까운 곳이 타인에겐 멀고 낯선 곳이라는 상대성 때문이기도하지만
어쩌면 쉽고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주변 속에서 은밀히 숨쉬고 있는
작은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어 특별히 마음 속에 갈무리해두는 시간
역시 여행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 여행이건 아니건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런 생각은 나중에야 오는 것들이고
아내와 나는 그냥 걸었고, 의미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었고
오래간만에 만난 서로가 기특해보여 어께를 감싸안아보기도 하고
연애 시절처럼 팔짱을 끼고 걷기도 했다.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그렇듯
부부간의 사랑도 당위의 구호나 의미만을 앞세운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게 보이는 단순한 행위들이 누적될수록 깊어지는 법 아니겠는가.
팔과 다리만 반복해서 움직이며 자연스럽게 공유한 시간 같은 것 말이다.

트레일의 끝에서는 멀리 강변에 몰려 있는 새 무리들과 그 너머로 멕시코지역이 건너다 보였다.

오고가는 길.
작은 도마뱀과 토끼와 개미를 보았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을 만났다.
그들은 숲과 어울려 혹은 숲의 일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누가 보건 안보건.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좋았던 아름다운 태초의 세상이 아직 거기에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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