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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 함덕 6

by 장돌뱅이. 2022. 10. 24.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므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 김광규,  「영산(靈山)」- 

구름 속에 숨은 제주의 영산 한라산을 바라보다 떠오른 시.
세월의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나의 '영산'의 모습도 추억해 보면서. 아니 뭐 '영산' 같은 걸 품고나 살았을까? 젊어서는 밥벌이를 했고 늙은 지금은 밥을 지으며 산다. 분명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내 생활에 큰 불만이 없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망치로 세상을 두드려 모기 소리만한 소리로 내는데도 안간힘을 쓰며 살아야 했지만 요란하게 세상을 흔들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커다란 망치를 크게 부러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올라온 시마다 제각각이다. 어쩔 수 없이 옮겨 적고 나중에 집에 돌아가서 시집을 보고 바로 잡아야겠다.)

돌아와 야구경기를 보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산책을 나갔다. 함덕해수욕장 주변의  점심을 먹을 식당과 "걸어가는 늑대들"이란 재미있는 이름의 갤러리의 위치를 미리 파악해 두었다.

*위 사진 : 타석에 선 김하성(중계 화면 캡쳐)

아내와 함께 샌디에고 파드레스와 김하성을 응원했다. 김하성은 모처럼 2안타를 치며 나름 선전했지만 팀은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마지막 경기가 될 수 있는 내일 5차전은 한국시간으로 새벽에 열려 볼 수 없게 되었다.

여행을 온  이래 처음으로 빨래를 해서 널었다. 여행 기간이 길어질수록 여행은 생활에 가까워진다.
짧은 여행을 할 때는 그냥 싸들고 집에 와서 밀린 빨래를 하지만 한달살이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청소와 빨래, 설거지를 하고 나며 마음이 개운해진다는 건  백수가 되고 난 후, 특히 아내가 허리를 다치고 난 후의 깨달음이다.

 아내와 20분쯤 걸어서 식당 예소담에 갔다. 나는 몸국으로 아내는 멸치국수를 주문했다. 몸은 갈조류 중의 하나인 모자반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몸국은 돼지뼈, 고기, 내장을 우린  육수에 모자반을 넣어 걸쭉하게 끓인 국이다. 제주도의 집안 경조사나 마을공동체 행사 때 빠지지 않았던 음식이라고 한다. 몸국은 구수했지만 애석하게도 아내의 멸치국수는 밍밍한 국물이 탐탁지 않은 맛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터넷의 평점이 나의 입맛과 찰떡궁합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식사를 마치고 함덕 해변을 걸었다. 제법 세찬 바람은 바다에 너울을 만들어 해변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무슨 날씨가 날마다 바람이야?' 하고 보니 제주도에 많은 세 가지 중의 하나가 바람 아닌가. 제주도에서 바람은 숙명이다. 피할 수 없다. 바람은 그 자체가 자연환경이면서 사람들이 사는 집의 구조와 마을의 모습,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규정하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그 바다에 나가보라. 큰 엉 쪽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당신은 보게 되리라. 세찬 바람에 시달리다 못해 몸을 한껏 뒤로 제친, 쓰러져 누워서라도 시퍼런 목숨을 부지한 우묵사스레피 나무 군락을. 나무들은 김영갑 사진 속의 바람처럼 세상에 지친 당신에게 말한다.
"영한 나도 살암시네. 살암시민 살아진다(이런 나도 살고 있잖느냐. 살다 보면 다 살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바람 부는 날에도 올레를 걸을 수 있는가. 나는 대답한다. 바람 부는 날 올레 길을 걷게 된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제주의 길만 아니라 제주의 삶을 느끼게 될 터이니, 바람 속에서 제주 바당은 당신에게 깊은 속살을 내어 보일 터이니, 어디 제주의 삶뿐인가. 당신의 인생에도 바람이 자주 불거늘.

- 서명숙, 『놀멍 쉬멍 걸으멍』 중에서 -

함덕 해변 동쪽 끝에 있는,  어린아이도 쉽게 오를 정도로  야트막한 서우봉에 아내와 함께 올라 낙조를 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최종 목표다. 허리 보조대를 풀고 오르면 더 좋겠지만 그건 욕심일 것이다. 그날은 제주의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걸어가는 늑대들"이라는 전이수라는 청년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들어가 보았다. 동화적인 그림들이 가득했다. 전이수 씨는 어릴적엔 TV 프로 "영재 발굴단"에 출연한 적도 있는, 글과 그림에 뛰어난 젊은 작가라고 한다. "걸어가는 늑대들"이란 이름은 작가가 자신의 식구들을 그냥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라고 직원이 말해주었다.

아내와 나는 저녁에 손자들과 영상 통화를 할 때 쓰려고 엽서 몇 장을 샀다.
새와 사자와 노루와 집과 꽃과 나무에 대해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갤러리의 담벼락과 엽서에는 작가의 재미있고 산뜻한 착상의  글들이 있었다.

갤러리의 부속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집에 있을 때 아내가 좋아하던 반찬을 매일 한 가지씩 만들기로 했다.
오늘 저녁엔 고구마밥과 콩나물매운볶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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