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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 함덕 8

by 장돌뱅이. 2022. 10. 26.

오늘 아침 산책은 서우봉 정상(109.5m)으로 잡았다. 이번 여행을 마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오를 수 있기를 바라는 곳이라 사전답사의 의미도 있었다. 서우봉을 향해 오를수록 눈에 들어오는 함덕의 바다와 해변, 하늘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자못 장쾌하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서우봉을 오르면서 본 함덕해수욕장
서우봉 정상 망오름에서 본 북촌 방향

아침식사를 어제처럼 찐밤과 우유로 했다. 찐밤을 두 끼 연속 먹었으니 나머진 냉동시켜놓고 내일부턴 다른 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날이 쌀쌀해져서 그런지 오늘은 사랑의 인사(엘가)나 부베의 연인,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같은 달달한 음악을 들었다. 

점심은 함덕 서쪽에 있는 존맛식당에서 나는 문어차돌짬뽕을 아내는 문어차돌냉파스타를 먹었다. 존맛식당의 '존맛'은 젊은 세대들이 사용한다는 '욕 나올 정도로(X나 ) 맛있다 '의 줄임말인 것 같다. '존맛탱(jmt)'이라고도 쓴다고 한다. 그리 좋은 어감으로 들리지 않는 걸 보니 나는 확실히 꼰대 세대가 된 모양이다. 식당 이름과는 달리 불맛이 배인 짬뽕과 특이한 모양새의 파스타의 맛은 나쁘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4·3'은 매우 흔하다(?). 제주도 전역에서, 제주도의 거의 모든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당시 정부의 경무부장의(오늘의 경찰청장) 직책에 있던 사람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제주도 전토에 휘발유를 뿌리고 거기에 불을 놓아 30만 도민을 한꺼번에 태워 없애야 한다"는 극언을 했다는 말도 전해온다. 한마디로  '제주 4·3 사건'은 해방과 미군정, 그리고 분단으로 치닫는 질곡의 상황에서 우리의 민족사적 모순이 집약적으로 표출된 사건이라 하겠다.

이후 '울음마저도 죄가 되는' 강요된 침묵의 시대가 이어졌다.  1960년 4·19 혁명 후 국회 차원의 양민학살 진상규명이 시도되었으나 5·16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제주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나 2000년 1월  4·3특별법이 공포되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사건 발생 55년 만인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함덕에서 가까운 곳에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1949년 1월 17일 ,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 이른바 '북촌리 사건'의 현장이자 추모공간이다.
너븐숭이는 널찍한 돌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흙은 살이요 바위는 뼈로다
두살배기 어린 생명도 죽였구나
신발도 벗어놓고 울며 갔구나
모진 바람도 순이 사촌도
억장이 무너져 뼈만 널브러져 있네

- 정희성, 「너븐숭이」-

기념관 바로 앞에 애기무덤이 있다. 안내판이 없다면 그곳에 무덤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정도로 작은 봉분들이다. 안내판엔 "북촌리 주민 학살 사건 때 어른들의 시신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다른 곳에 안장되었으나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한 상태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현재 20여 기의 애기무덤이 모여 있는데 적어도 8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때 희생된 어린아이 무덤"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내는  "꽃이라도 한송이 가져올 걸"하며 안타까워했다.
애잔한 마음으로 무덤 옆 비석에 있는 추모시를 읽었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뺏아 갔을까
돌무더기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혼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 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 양영길, 「애기 돌무덤 앞에서」 중에서

애기 돌무덤

이곳은 또한 1978년에 발표되어 4·3 규명의 기폭제가 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현장이기도 하다. 기념관 앞쪽 작은 옴팡밭에 '순이삼촌 문학비'가 서있다. 옴팡밭은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사건 당시 이곳에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문학비 주변에 함부로 버려진 듯 눕혀져 있는 비석들은 당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각각의 비석에는 「순이삼촌」 소설의 문장들이 새겨져 있다.

··· 마당에 하얗게 깔려 있던 것도 싸락눈이었다. 그 시간이면 이집 저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날 우리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 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터져나오던 곡소리, 음력 섣달 열여드렛날,  ··· 

···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리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낸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

기념관에 비치된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의  소책자 『4·3이 머우꽈II』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요즈음 들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흉포했던 학살의 아픈 역사가 4·3의 전부는 아닙니다. 4·3의 겨울은 최고조에 이른 열정을 짓밟아 버리기 위해 그 몇 백 배의 극한의 공포와 탄압을 퍼부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유하는 세포 자체를 파괴함으로써 결국 제주4·3은 죽음만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대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제주4·3은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입니다.
(···)
이제 4·3의 봄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3·1와 3·10총파업, 4·3 봉기와 5·10 단선거부, 그 항쟁의 봄의 열정과 정신을 말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그 뜨거웠던 8·15 해방의 여름, 일본 제국주의도, 친일파도, 미국이라는 외세도 없었던 순수절정의 한반도 해방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4·3이 우리에게 환기하는 바로 그 '정신'입니다. 이것이  4·3의 정명(定名)을 위한 바른 길입니다.
뭘 가지고 4·3의 정신이라고 하는가요?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 어둠에서 빛으로? 과연 그런가요? 자주독립과 해방통일이 바로 진정한 4·3의 정신입니다. 무엇이  4·3의 전국화, 세계화인가요? 4·3의 전국화는 국가권력에 의한 지역주민의 희생과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독립을 외쳤던 당시 제주도민들의 투쟁의 역사를 전국에 전파하는 일입니다. 4·3의 세계화는 미국이 관여하고 제주가 저항한 4·3의 문제를 세계인과 공유하면서 저마다의 자기 결정권과 자주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평화세상을 지구촌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빛이요 상생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화요 인권입니다.

오래간만에 한라산의 실루엣이 온전히 드러난 저녁이었다.
양파볶음덮밥으로 저녁을 먹고 단감으로 후식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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