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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 함덕 11(결혼38주년)

by 장돌뱅이. 2022. 10. 29.

아침에 숙소 주변, 해변이 아닌 중산간 쪽으로 걸어보았다. 평범한 마을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았던 귤밭을 만났다. 사진을 찍다가 귤 수확을 준비하고 있는 초로의 사내와 말을 트게 되었다.
이제껏 커다란 귤밭은 서귀포 일대에만 있는 걸로 생각했다는 나의 말에 그가 말했다.
"빌레는 제주도 말로 돌인데 빌레 위의 흙 층이 얇아서 조천의 귤이 서귀포 귤보다 당도가 높아요."
내게 물론 그 말의 사실 여부를 파악할 지식은 없다. 하지만 그가 맛보라고 건네준 귤은 적어도 하나로마트에서 사다 먹은 귤보다는 맛이 있었다. 그는 극조생의 귤이라 농협에 납품하기 위해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3일 정도는 할 예정이라고 했다. 

귤밭 가운데 있으면서도 또다시 돌담에 둘러싸인 무덤이 편안해 보였다.

오늘은 결혼 38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대 가수 '사월과 오월'의 노래 「등불」을 반복설정으로 틀어 놓고 음식을 만들었다.
「등불」은 아내와 내가 연애 시절부터 좋아하던 노래라 결혼기념일의 '애국가'가 되었다. 운전하다가 이 노래가 나오면 아내의 손을 잡고 합창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존재하지도 않을, 우리만의 작고  시시할 수도 있는 기억들을 아내와 나는 크고 대단한 의미로 품고 살려고 했다.
늘 어제와 같은 오늘을 바라면서.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奇蹟(기적) 아녀

- 황지우, 「발작」-

근처에서 묵고 있는 아내의 친구 부부를 초대했다.
조리도구도 마땅찮고 그릇도 별로 없어 손님맞이를 위해 마트에서 일회용품을 사 와야 했다.

어설픔에 낯섬까지 더해진 환경 속에 수선을 떨며 가까스로 몇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떨어질 무렵, 손님 두 분이 왔다.

차돌박이고추장찌개
가지구이무침
해물잡채
삼겹살구이와 들깨파채 무침
두부샐러드

식사를 마치고 제주도 특산품이라는 작은 당근케이크 한 조각에 촛불 한 개를 켰다.
손님들에겐 그제야 오늘이 결혼기념일임을 알렸다. 
그리고 함께 「등불」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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