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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 함덕 16

by 장돌뱅이. 2022. 11. 4.

버스에서 내렸을 때 아직 옅게 남아 있던 아침 안개는 마을길을 따라 월정리 해변까지 가는 동안 말끔히 걷혔다. 그리고 시리게 푸른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텅 빈 해변엔 장난을 치며 오르내리는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파도소리와 함께 실려왔다. 지나가며 눈이 마주치자 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말을 건네 왔다.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왔을까 짐작하며 물어보니 말레이시아에 왔단다. 그들은 초면의 이국의 낯선 남자 앞에서도 전혀 쑥스러워움 없이 다양한 포즈로  사랑을 표현했다. 나도 함께 즐거워 여기저기 좋은 배경을 추천까지 해가며 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내와 연애를 하던 젊은 시절  그들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적극적인 사랑 표현을 해보진 못했지만 마음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올레길을 따라 해변을 벗어나니 돌담이 지천이다. 밭담이고 집담이고 산담이다. 저 돌담을 오래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다녀가는 이의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발상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길은 다시 바다와 만나 행원포구에 이르렀다. 올레길 20코스의 중간 지점이기도 한 이곳엔 "광해군 기착비"라는 작은 비석이 서 있다.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637년 유배소를 제주로 옮기려 압송되어 6월 16일 이곳으로 입항하였다. 호송 책임자가 제주라고 알려주자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결국 그는 제주도에서 1641년 7월 1일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은 집권 시기에 세제를 개혁하려 하고, 강성한 여진족의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실리 외교를 펼쳤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의 실리 외교를 돌아보면 나날이 긴박해져가는 지금의 한반도를 주변 상황을 풀어가는데 어떤 참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올레 패스포트에 확인 도장을 찍는데 건너편 풍력 발전기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밤샘 작업을 마친 어선들이 아침에 포구로 돌아와 장이라도 선 건가 하는 생각으로 다가가 보니 해녀들이 모여있었다. 물질을 하러 나갈 참인 것 같았다. 대부분이 나이가 꽤 드신 분들이었다. 주위에 앉아 눈을 감고 해녀들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려고 집중해 봤지만 허사였다. 한 마디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겐 여전히 어려운 제주도 말이다.  

"솔삼춘"은 규모가 작은 식당이다. 실내에 테이블은 2개가 전부다. 실외 베란다에 두 개 정도가 더 있지만 날씨에 따라 사용에 변수가 있을 것 같다. 조용한 젊은 남자 사장 혼자서 서빙도 하고 요리도 한다. 만드는 음식의 가짓수도 몇 되지 않는다. 파스타를 위주로 한다.  아내는' 딱새우 비스크 파스타'를 나는 '흑돼지 토마토 파스타'를 식당에서 만드는 수제 맥주와 먹었다. 둘 다 나쁘지 않았지만 아내는 다음에 온다면 '흑돼지 토마토 파스타'를 먹겠다고 했다.

『문기유림(文奇類林)』이라는 중국 책에는 조화옹이 사람에게 명예와 부귀는 아낌없이 주지만 한가함(閑)만은 잘 주지 않는다고 나와 있다.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不是閑人閑不得 閑人不是等閑人)

아내가 다친 것은 다만 불운일 뿐이지만 그로 인해 행동반경이 제약을 받으면서 여행은 한가로워진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어쩔 수 없어도 한가로운 건 감미로운 것이다. 생각해보면 몸에 이상이 없던 작년 제주 한달살이도 그랬다.

식사를 하고 정주항에서 신흥리까지 바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낚시하는 사람 구경도 하고 물가에 가서 손을 적셔보기도 하면서. 조화옹이 부귀만 주었으면 명예는 물론 한가로움까지는 우리가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공연히 억울해하기도 하면서.

저녁엔 상추와 깻잎쌈을 먹었다. 오래간만에 호박과 감자를 넣고 된장찌개도 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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