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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제주 함덕 30

by 장돌뱅이. 2022. 11. 17.

최규석의 『송곳』은 제주에서 읽은 마지막 만화다.
프랑스계 대형마트 푸르미에서 벌어지는 노동운동에 대해 그렸다. 부당해고에 맞선 직원들의 노조 결성과 저항, -그러나 그 저항은 생경한 구호나 격렬한 투쟁으로 그려져 있지 않다. 누군가의 거룩한 희생도 없다. 다만 '시시한 약자'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을 진 채 갈등하고 고민하며 '시시한 강자'들에 맞서 행동한다. 그 디테일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회사의 편도 노조의 편도 아닌 곳에 나의 자리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자리를 결정할 권리는 나에게 없었다.

만화 속 한 중간관리자의 고백이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이 급증하던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에게 실감 나게 다가왔다. 그때 내가 어떤 위치를 선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간관리자라는 애매한 경계와 위치를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다가오는 그 시기마다 확인하며 직원들에게 '서로 인간적인 관계만 망가뜨리지 말고 잘 지나가 봅시다'라는 역시 애매한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저도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저보다는 여러분들께, 여러분들보다는 반달치 월급 때문에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입 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직들에게 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 절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은 노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가 노동운동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하며 주인공 이수인의 말은 읽었다.

이제 여행이 하루만 남았으므로 마지막 '냉파'를 하는 날이다.
아침엔 이런저런 재료로 죽을 끓이고 점심에 비빔밥을 만들었다. 아내는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고 했다.

함덕해수욕장과 서우봉 둘레길을 산책했다. 여행 총청리의 산책이라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
함덕을 중심으로 한 자발적 '유폐'의 한달은 나른하고 감미로웠다.
손자친구들만 아니라면 굳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을 만큼.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 문정희, 「한계령을 위한 연가」-

시 속의 한계령을 함덕으로만 바꾸면 지금 아내와 나의 마음일 것이다.

산책을 마치고 빵집 오드랑에서 간식을 먹었다. 남은 빵은 내일 아침으로 먹을 생각으로 두 개를 주문을 했다. 오드랑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이다.

여행 첫날 저녁에 돼지고기 구이를 먹었다.
간식으로 배가 불러 늦어진 마지막 저녁도 돼지고기로 했다. 들깨소스 파채 무침도 곁들였다.
요리를 하고 남은 청하와 손님 접대를 하고 남은 무알콜 맥주로 아내와 건배도 했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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