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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고향은

by 장돌뱅이. 2023. 1. 21.

내가 태어난 서울의 맨 동쪽 끝 마을은 특별히 고향이란 의미로 떠오르진 않는다. 어릴 적 마을은 당연히 사라져 버렸고, 사람들도 모두 떠나가 굳이 찾아가 본들 아는 친구 하나 없는 타향이 되었다. 다녔던 초등학교나 중학교가 있지만 거기도 옛 모습은 아니다.

아래 시에서 그리는 고향처럼 오래전 '벗어놓은 외투 같'이, 한 때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지만 '내가 빠져나가' 버린 '후줄근한 중고품 같은 공간.' 썰렁하다.
하지만 상실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특별히 아쉽지도 않다.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 조말선, 「고향」-

설날을 앞두고 음식 계획을 짰다. 명절이니만큼 우리 집 '장금이' 곱단씨도 부엌일에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곱단씨는 장기(長技)인 갈비찜과 샐러드와 대구전을, 나는 해물잡채와 소고기 고추장찌개를 만들기로 했다. 떡국 떡도 미리 사다 놓았다. 메뉴 선정 기준은 명절 손님 취향에 맞췄다. 베란다 문과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고 청소도 하며 곱단씨와 "사람 사는 곳엔 가끔씩 손님들이 와야 묵은 때도 벗기고 새로워진다"고 이야기했다.

곧 딸아이와 사위, 그리고 처음 입어보는 두루마기를 귀찮아 하면서도 뽐내는 손주저하들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 내게 '고향'은 지나간 기억 속의 서울 동쪽 끝마을이 아닌, 그들과 만나고 보내는 시간에 있다. 아
직 도착하지 않은, 혹은 이미 곁에 머무르고 있는 버스 정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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