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는 식의 입학철 대학 수석합격자들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속으로 '재수 없어'라고 빈정거리곤 했다. 근근이 턱걸이로 대학과 직장에 들어간 나의 열등의식과 질투에서 나온 냉소일 것이다. 나와 같이 쓸모없는데 예민한 어떤 후배 녀석은 그럴 땐 그냥 '재수 없어' 하지 말고 '재섭써!'라고 줄여서 말해야 어감이 살아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아무튼 사진 속 최재천의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재섭써'를 반복해야 했지만 특히 다음과 같은 저자의 경험담은 '왕재섭써!'였다.
"'인간은 왜 잠을 자야 할까? 나는 할 게 너무 많고 읽을 게 너무 많은데 왜 이렇게 포근하고 졸릴까? 나를 용서할 수 없다.' (···) 새벽 2 -3시인데도 공부를 끝내기 싫어서 더 읽고 더 찾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그래도 조금 더 자둬야 내일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새벽 3시에 기숙사로 갔어요."
술을 먹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아쉽게 판을 접었다면 이해가 가지만, 제길! 공부를 끝내기 싫어서 잠이 오는 게 싫다니!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니!
『최재천의 공부』는 매사에 벼락치기로 살아온 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하루 일과를 30분 단위로 촘촘히 쪼개서 산다는 한 '범생이'의 공부에 대한 경험과 열정을 밝힌 대담집이다. 책 표지에 나온 최재천 교수의 이력을 통해 그의 삶의 대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평생 자연을 관찰해온 생태학자이자 동물학자. 서울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에서 생태학 석사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0여 년간 중남미 일대를 누비며 동물의 생태를 탐구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명에 대한 지식과 사랑을 널리 나누고 실천해 왔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 한국생태학회 회장, 국립생태원 초대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생명다양성재단의 대표를 맡고 있다.
『최재천의 공부』는 공부라는 주제를 걸었지만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닌 다양한 내용을 나눈 대담집이어서 책 전체를 요약하기보다 목차에 따라기억에 남는 말을 뽑고 거기에 나의 '재섭써' 수준의 단상을 붙여 보았다. 책의 공동 저자이자 대담을 이끈 안희경은 재미 저널리스트라고 한다. 어떨 때는 안희경 씨의 질문이나 해석이 최재천 교수의 말만큼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의 말을 구분 없이 인용했다. 푸른색은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1. 공부의 뿌리
우리에게는 집단적 현명함이 있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우리 국민에게서 집단 지성의 힘을 느낍니다. 문제를 이해하는 능력이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코로나 19라는 난국에도 집단적 현명함이 발현됐습니다. (···) 공동체 의식입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우리는 '금모으기 운동'도 했죠. (···) 다 죽을 것 같은 상황이 벌어져 겨우 서로의 안녕을 생각하는('재난 유토피아') 게 아니라, 늘 사회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교육하고 배워야겠다는 게 제 의지입니다.
- 이른바 '지당도사'의 말씀. 이 '지당'이 현실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집단 지성'은 늘 '막장의 소수'가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를 치우기에 힘이 들어 보인다.
미국학생들은 한 시간을 주고 (문제를) 풀라면 못 풀지만 2 ∼3주를 주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풀라고 하면 대부분 푼다는 거죠. 그 정도까지는 중고등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경쟁하는 문제풀이 훈련만 시키고, 실제로 할 숫 있는가 없는가를 좌우하는 능력을 키워 주진 않는 것 같습니다. (···)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반드시 뭘 해야 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잖아요. 물론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마감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한 시간 안에 모든 해법을 찾아야 하는 긴박한 삶을 평생 살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문제를 인식하고 숙고할 시간이 충분히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자원을 동원해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까'를 가르쳐야 하는데 , 우리는 주어진 문제를 한정된 시간 안에 어떻게 푸는지를 가르치죠.
- 중고등학교를 마친 일반적인 미국학생이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날 저녁 딸아이네와 술 한 잔을 하며 손자친구들의 교육 이야기를 하다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각자의 학창 시절 경험에 비추어 가족 모두가 긍정하는 분위기였다는······
2. 공부의 시간
함께 모여서 해야 할 일도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고 조사하고 읽는 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 멍 때리는 시간을 창조적 행위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화적 결핍, 고독과 고립을 혼동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미래가 있다. 번잡함에 매몰되면 그냥 먹고살기만 할 뿐이다. 나로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히 어려웠지만.
3. 공부의 양분
저는 미리 쓴 뒤 계속 고칩니다. (···) 1주일 전에 탈고한 뒤 3~4일간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한 50번 고칩니다. 읽고 고치고 또 읽고 고치고 저장해요.
- 약간의 고료를 받고 글을 쓰던 시절, 나는 한 번도 미리 준비해 둔 적이 없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나 문불가점(文不加點)의 재주도 없으면서 회사 일과 병행한다는 핑계로 늘 마감 시간에 임박해서야 겨우 끝내곤 했다.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느냐 미느냐는 섬세함까진 아니더라도 좀 더 성실했어야 했다. 러시아의 대문호 투르게네프도 글을 써서 책상 속에 넣어 두고 몇 달에 한 번씩(자기가 썼다는 것을 잊어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고쳤다고 하지 않던가. 아울러 비단 글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나는 미리 미리 준비는커녕 늘 오늘 할 일을 가능한 내일로 미루며 살고 있기에 이 대목이 켕겨왔다.
책은 우리 인간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발명품인데, 그 책을 취미로 읽는다? 이건 아니죠. 독서는 일입니다. 빡세게 하는 겁니다.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그늘에 가서 편안하게 보는 건 시간 낭비이고 눈만 나빠져요.
- 나는 그늘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는 스타일이다. 성경책도 소파에 누워 읽을 때가 있다. 백수이므로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독서를 하진 않는다. 잘못인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은 어떻게 구분을 하지? 나는 자신의 생각을 잃지 않는 한 모든 독서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고 생각한다.
읽기, 쓰기, 말하기인데, 결국 , 말을 잘하려면 글쓰기를 잘해야 하니, 평소에 많이 읽고 많이 관찰해야 합니다.
- 이 말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커다란 코끼리 똥으로 비유하니 실감난다.
어마어마한 양의 창조적 '배설'은 당연히 그보다 많은 '대식(大食)'에서 나온다.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약한 지점은 토론이에요. 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교과과정을 마칩니다. (···) 우리나라가 선거 연령을 만 18세로 낮췄잖아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고등학교에서 정치 토론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어요. 과연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까요?
- 고등학생들이 어떤 정치적 의견을 제시하면 정치 '꼰대'들은 그 '배후'를 들먹이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러나 4.19 같은 역사의 격변기마다 고등학생들은 올바른 선택과 행동을 해왔다. 판단은 어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세쿼이아국립공원에 있는 세쿼이아의 경우, 제너럴셔면, 즉 셔먼 장군 General Sherman이라고 이름 붙은 나무의 수령은 2,300년~2,700년 사이라고 하는데요. (···) 제너럴셔먼 한 그루가 대기 중에서 빨아들인 탄소량은 무려 392톤이라고 합니다.
- 제너럴 샤먼 나무는 높이가 84미터, 둘레가 32미터, 직경이 11미터, 무게가 2천 톤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나무이다. 꼭 제너럴 샤먼이 아니더라도 세쿼이아 공원의 나무와 숲은 아내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다지 크게 호감을 갖지 않고 살아온 미국이라는 나라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자연이 주는 경외감 때문이었다.
다윈이 친구인 사회학자 하버트 스펜서의 표현을 받아들여 쓴 말이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 '입니다. (···) 적자생존'을 최상급으로 표현하는 바람에 우리가 무지무지 적응을 잘해야만 살아남는 것처럼 이해하게 됐어요. (···)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에서는 꼴찌만 아니면 삽니다. (···) 가장 잘 적응한 하나만 살아남고 다 죽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시대에는 아무도 안 떨어져요.
-인간이 없었다면 지구는 더 아름다웠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코미디 프로에서 나왔던 유행어처럼, 자연은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이 만든 세상은 잘 적응한 하나만 기억한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오래된 질문이다.
4. 공부의 성장
창의력은 경험에서 나온다. (···) 창의력은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가르치려고 덤벼들 때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 우리의 현실은 조바심이 이는 구조입니다. (···) '경험하기'보다는 학력을 높이는 진학이나 시험준비로 선회합니다. 진짜 공부는 경험하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성적은 성실함을 측정하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창의성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 '세상 경험 중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모든 경험은 언젠가는 쓸모가 생긴다'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 옛날에 경난(經難)이라 하여 힘깨나 쓰는 집안에서는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면 먼 타향으로 여행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세상 구경과 경험을 시키는 과정이었다. 창의력은 책의 안과 밖, 그 경계에서 피는 꽃 아닐까? 책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을 성찰케 하는 사유의 도구이지만, 체험은 그것만으론 채울 수 없는 다른 형태의 지혜가 자라는 모태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고 난 다음엔 반드시 덮게. 모든 길은 책 바깥에 있으니까."
기성세대의 더듬이에 걸리는 신호와 젊은 세대의 더듬이에 걸리는 신호가 다른 거 같아요.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온몸으로 느끼고 있어요.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유를 묻지 말고 무조건 도와주는 겁니다. (···) 아이들은 확실히 안다는 확실한 느낌이 있어요. 기성세대는 감지하지 못하는 신호를 아이들은 감지하고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게임을 하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그 모니터 앞에서 이미 느끼며 살고 있어요.
- 선사시대 동굴에 쓰여 있는 문자를 해독해 봤더니 '요즘 세상은 말세다' 그리고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없고 철이 없다'였다는 농담이 있다. 이런 '꼰대'들의 독단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정말 쉽지 않다. 가정을 일군 다 큰 딸아이와도 언쟁을 벌이는 나에게서 가끔씩 그런 모습을 보곤 한다.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냉철한 자기반성과 결단이 필요하다. 세상은 늘 '말세'에서 '젊음'의 힘으로 진전을 해왔다고 믿고자 한다.
저의 딴짓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습니다. 제가 생물학만 공부했다면 저는 지극히 평범한 곤충학자, 어쩌면 신기한 작은 곤충을 연구하는 사람으로만 살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지랖이 넓게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공은, 아무리 생각해도 딴짓밖에 없어요.
- 이태원에 "안씨막걸리"라는 술집이 있다. 미국 유명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신의 직장'이라는 구글을 다니다 그만두고 요리공부를 시작한 안주원 씨가 차린 곳이다. 그가 말했다.
"행복해지는 법을 찾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눈뜨자마자 엄청난 용기가 솟아나서도 아니고 누군가가 알려줘서도 아니었어요. 처음엔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손대기 시작한 제빵과, 전공과목이 지겨워 일부러 들었던 철학 수업, 운동하려고 시작한 춤, 이런 '딴짓' 속에서 행복의 단서가 보였어요. 내가 무얼 할 때 즐겁고,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말이죠."
행복이란 게 참 오묘한 곳에 숨어 있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5. 공부의 변화
요즘 젊은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졌어 라고 이야기하는 대다수는 기성세대인데요. 과거의 눈으로 내린 평가라고 봅니다. 요즘은 정보의 파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상으로 완성할 수 있는데, 예전에는 책처럼 잘 짜인 완성본을 읽어야 제대로 봤다고 여겼잖아요. (···) 지금 인터넷을 뒤지는 젊은 세대는 스스로 편집합니다. 기성세대는 명저 한 권을 붙들고 흡수했죠. '이 대가가 이렇게 이야기하시는구나'라면서 쭉 읽고, '다 이해했어' 하며 책을 덮었습니다. 이해했다는 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거죠. 젊은 세대는 스스로 여러 정보를 검색해 나름대로 취사선택하고, '뭐 이래?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야?'라고 판단도 하면서 그 화면은 닫고 다음 걸 읽죠. 자기가 편집을 합니다.
감성이나 감각이 자연스레 논리적 사고에 영향을 미칠 순 있죠. 그런데 너무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대하면 편파적 편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 세대가 가진 위험으로 지적받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고요. 마음이 맞는 사람만 페이스북 친구로 삼고, 마음이 맞는 사람이 보내준 글망 읽고, 정치 성향에 맞는 신문만 읽고, 한쪽으로 쏠려서 정보를 접한다고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기성세대는 안 그랬을까요? 지금이 옛날 보다 더 편향적일까요? 인터넷 알고리즘이 편향성을 부추기긴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왜냐면 젊은 세대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제공받습니다. 그중에서 자기 취향에 맞는 것만 취한다고 그러는데, 자기 걸 찾으려면 뒤져야 해요. 뒤지다 보면 아주 세심하게 읽지는 않아도 조금씩은 맛보게 되죠. 그래야 '뭐, 이런 꼰대 같은 소리를 해'라고 하면서 버릴 수 있어요. 그 자체가 샘플링이고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기성세대는 당시에 그런 파악을 잘했을까요?
- 인터넷으로 세대 간의 공감이 더 쉬워진 것일까? 아니면 어려워진 것일까?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표용하는 자세는 이 경우에도 필요한 덕목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학자들은 (···) 네이쳐나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은 거의 읽지 않는다고 해요. (···) 오히려 빅데이터를 분석하면서 판도를 대략 읽고, 변방에 있는 비주류를 찾아서 읽어본다고 합니다. 그중에 어느 것은 몇 년이 지나 주류가 된다는 거죠. 지금 주류를 보고 있으면 얼마 후에 주류에서 밀려날 것을 보는 것이고 자꾸 비주류를 뒤지다 보면 거기서 주류로 진입하는 경향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인간의 역사는 변방, 주변부, 비주류가 끊임없이 중심과 주류를 향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두 대척적 가치와 의미가 길항(拮抗)과 소통을 통해 새로운 중심을 만들고 주변을 형성한다. 비주류의 미래를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들이 역사를 이끌어 온 것 아닐까.
"나는 여러분이 등록금을 안 내면 좋겠다. 등록금을 나라가 내고 기업이 내고 독지가가 내면 된다. 학생은 돈을 안 내고 대학에 다녀야 한다. 그러나 대학의 등록금이 지금보다 더 비싸지기를 , 나는 원한다. 왜냐면 대한민국의 대학은 구조상 등록금으로 많은 걸 해결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등록금을 깎는 것이 아니라 대학에 들어오는 돈을 늘리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저는 우리 경제가 그 정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돈을 내주고, 기업이 돈을 내주고, 소수의 기부금을 내고 들어올 수 있도록 대학이 문을 열어주자. 100명이 들어오는데 그중 두 명이 기부금으로 들어온다면 용인해 주자. 그 덕에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열 명이 들어올 수 있으면 괜찮지 않은가."
- 책 속 최재천 교수의 말 중에 어쩌면 유일하게 동의를 하지 못한 말이다. 국가적 지원 이외에 기업과 독지가가 돈을 내거나 소수의 기부금으로 대학 운영을 하자는 방안은 심각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아무리 제어 장치를 제도적으로 마련한다고 해도 돈은 위력을 떨치기 마련이다. 하물며 특혜와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기여입학이야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돈을 주고 입학을 사는 행위는 선의의 효과를 정당성으로 한다고 해도 대학이라는 제도의 원천적 존재 이유와 목적에 위배된다.
"대학의 목적은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로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다. 사실 교육과 연구에는 돈이 많이 들기에 대학은 후원금 모금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돈벌이가 입학정책을 좌우한다면 대학은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인 학문 추구와 시민의 기대 부응에서 멀어지고 만다."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중에서 )
6. 공부의 활력
리더가 입을 열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요. 집단 지성을 이루고 창의성을 끌어내려면, 리더는 어금니가 아프도록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이런 원칙을 자주 지키지 못했던 것 같다. 은퇴 후 가족이나 주변인들과 관계에서도 자주 잊어먹는 원칙이다. 나이가 들면 양기가 입으로 몰린다고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예의는 이를 악물면서라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겠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악착같이 찾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대부분은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돼요. 내 길이 아니라는 걸 발견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되죠.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고속도로 같은 길이 눈앞에 보입니다. '이거다!' 싶으면 그때 전력으로 내달리면 됩니다.
- 아나운서가 되어볼까 하고 대학생 때 당대 최고의 앵커 봉두완 씨를 찾아가고 외교관은 무엇을 하며 사나 알아보려고 직접 대사관을 찾아가 보았다는 최재천 교수의 적극적 방황(?)은 대단하달 수밖에 없다. 나는 무엇이 되어보고자 그처럼 강력한 의지가 있었을까? 없었다. 대학 갈 때니 대학 가고 취업을 할 때니 회사를 가며 살았을 뿐이다. 아내의 연인이 되기 위해서만은 유일하게 골몰했던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제일 잘한 일이다.
삶 전체로 보면 저는 끊임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누려왔습니다. 오히려 제 아내가 자기 공간을 빼앗겼죠. 저 때문에 뜻을 꺾고 ······
- 결혼할 무렵 내게 '니가 밥 짓고 빨래하는 걸 배워 가사를 책임지고, 애인에게 경제를 맡기는 것이, 니 집 마련의 지름길 아니겠냐'고, 요즘 말로 하면 전업주부의 길을 권하며 낄낄거리던 친구 녀석이 있었다. '성적증명서에 씨(C)를 뿌리고 권총(F) 거두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학점도 좋았고 교직이라는 안정적 직장에 있었기에 농담만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나를 따라 지방으로 오며 교직을 떠나야 했다. 최재천 교수가 언급한 칼릴 지브란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를 기억하고자 했지만 일상에서 그것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아내에게 진 삶의 빚이다.
(*이전 글 참조 : 하늘의 바람이 춤추게 하라)
후주 : 나의 공부 그리고 모두의 삶(안희경의 글)
지식은 그러합니다. 취하고 삭히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안다'라는 인식에도 갇히지 않아야 온전히 나의 지혜로 살려낼 수 있겠지만, 일단 지식은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 삶을 사리는 통찰로 솟구칠 구조물을 만들어 냅니다. 어린나무가 곧추서도록 지지대를 받치듯 우리 안에 있는 지혜가 붙잡고 일어날 버팀목을 세워내는 거죠. 공부 속에서 그 지지대를 만들어 나답게 사는 길을 내며 나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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