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헬프』는 1960대 초 백인가정의 흑인 가정부들이 겪는 인종차별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유색인종과 화장실을 함께 쓰면 병이 옮는대. 나는 우리 아이들 지킬 거야."
백인 부인의 이 말이 모든 상황을 집약해서 설명한다.
흑인가정부용 화장실을 집 밖에 설치해 놓은 것이다.
'분리하되 평등하게 (separate but equal)'.
그러나 이 말은 세모난 동그라미처럼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분리가 이미 불평등이다.
돈 셜리 Don Shirley 는 유명한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1960년대 초 이른바 딥사우스(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등)로 남쪽 지역으로 콘서트 투어를 떠난다. 딥사우스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방군을 형성했던 곳으로 1865년 공식적인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 100년이 지났음에도 다른 지역보다 인종 차별의 뿌리가 강하게 남아 있는지역이었다.
영화 제목인 『그린북』은 흑인이 '안전하게' 남쪽 지방을 여행할 수 있는 방법, 즉 흑인(만)이 머물 수 있는 식당과 호텔, 주유소 등을 안내하는 책자였다. 백인들의 편의시설에서 흑인들을 '분리하되 평등하려는' 차별이 낳은 산물이기도 했다.
돈셜리는 자신의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었지만 차별은 교양 있고 지적이고 명성 있는 연주가 돈셜리에게도 '평등하게' 적용되었다. 남쪽으로 갈수록 숙소의 상태는 나빠지고 자신이 고용한 백인 운전수와도 다른 곳에서 잠을 자야 했다. '평등하게 분리된' 곳에서 벗어나면 가차 없는 물리적 폭력이 가해졌다.
백인들이 돈셜리에게 바라는 것은 그의 세련된 교양, 풍부한 지성이 아니라 오직 연주 기능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백인들의 문화적 취향을 만족시켜 주는 일종의 연주 '노예'였다. 백인들은 돈셜리를 위대한 연주자로 소개하고 환영했지만 정작 돈셜리는 인터미션 시간에 별도로 지어진 허접한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고, 심지어 자신이 연주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흑인이 그곳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건 오랜 전통이라고 식당 사람들은 양해를 구했다.
영화는 돈셜리가 운전기사 겸 보디가드로 고용한 토니와 순회공연을 다니며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다. 무식한 이탈리아 이민자인 백인 토니는 집을 고치러 온 흑인 설비 노동자들이 사용한 유리컵을 병균인 묻은 듯 조심스레 쓰레기 통에 버리는 인종주의자였지만 생활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흑인인 돈 셜리를 따라나서게 된다.
영화 초반 돈 셜리가 화려한 옷을 입고 터무니없이 높은 의자에 앉아 토니를 내려다보며 채용 면접을 하는 장면은 기괴하다. 백인처럼 어떤 막연한 권위를 갖거나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즉 돈 셜리가 지닌 왜곡된 열등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다. 프란츠 파농이 말하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겉으로 자존감과 품위를 지키며 고상한 '정신 승리'를 유지하려는 그의 버팅김은 안쓰럽지만 세상의 견고한 차별과 편견의 벽을 허물기에는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역부족인 상황인 듯했다.
좌절은 피할 수 없어 보이고 마침내 그는 절규한다.
"그래! 나는 나만의 성에 갇혀 혼자 산다! 부유한 백인들은 자신과 자신들의 고상한 문화적 취향을 위해 나 보고 연주를 하라고 하지만, 내가 무대에서 내려오면 나는 그들에게 그냥 보통의 깜둥이일 뿐이다. 그게 그들의 진짜 문화적 취향이다. 그리고 나는 흑인들도 그들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 고통스럽다. 내가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뭐라는 말이냐?"
흑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은 요즈음도 가끔씩 언론에 보도된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을 통해 그런 사정을 알게 될 뿐이지만 그 배경에는 영화『헬프』와 『그린북』속 차별이 아직도 일상적으로 상존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전 글 참조 1 : 짐머맨 재판
*이전 글 참조 2 : "I CAN'T BREATHE!" )
폭력을 시작하는 측은 타인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간으로서 승인하지 않는 억압자들이지, 억압과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피억압자들이 아니다. 불만을 먼저 터뜨리는 쪽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만을 사랑하느라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테러를 먼저 저지르는 쪽은 테러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이 아니라 '인생의 불합격자'를 낳는 구체적 상황을 만들 만한 힘을 지닌 난폭한 사람들이다. 압제를 먼저 시작한 쪽은 압제의 희생자들이 아니라 압제자들이다. 증오를 먼저 품은 쪽은 경멸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성을 빼앗은 사람들이다(그들은 그럼으로써 자신의 인간성도 부정한다). 무력을 사용하는 쪽은 강자의 지배하에 약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약자를 희생시켜 강자가 된 사람들이다. 하지만 억압자들이 보기에 불만을 품고,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사악'하고, '사납게' 보이는 쪽은 언제나 그들의 폭력에 맞서는 피억압자이다.(심지어 그들은 '피억압자'를 명시적으로 지칭하지 않고, 같은 동포인지 여하에 따라 다양하게 '그 사람들', '분별없고 시기심 가득찬 대중', '야만인', '원시인', '파괴자' 등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Pedagogy of the Oppressed)』-
예롱의 남자친구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온 흑인이고 이름은 "만니"다.
만화『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는 그 둘이 (혹은 마니와 같은 흑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차별과 편견이 얼마나 흔하고 다양한가를 알려준다.
남친이 외국인이라는 걸 알 때 자주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영국? 미국? 가나? 가나가 어디여? 아프리카에 있어? 뭐야? 혹시 흑인이야?"
"집에 사자나 기린 같은 거 키우겠네."
"가족들과 통화에 스마트폰을 쓴다고? (거기도 그런 게 있다고?)
"대화는 어떻게 해? 그 사람 영어는 할 줄 알아? 왜 백인은 안 만나고? "
"직업은 영어선생님? 그럼 뭐 하는데? (흑인이) 영어교사나 막노동 이런 거 말고 또 있나?
(마니는 의학연구소에서 일한다.)
"아 그 사람이랑 결혼은 안 할 거지? 너희 부모님은 아셔?"
"우와! 개멋져! 야 흑인 개간지잖아. 랩 잘해? 머리 만져 봐도 돼?"
"난 네가 미국사람인 줄"
(언어교환" 앱으로 오랫동안 서로의 언어를 배우고 우정을 쌓아 왔는데 갑자기 차단을 하며 남긴 말.)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흑인이라니······."
(연인을 가족에게 소개했을 때 반응)
심지어 "진짜 고추가 커?"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몰라서 하는 차별도, 편견에 근거한 칭찬이나 동경도 인종 차별이다.
한국 사람이라고 판소리를 다 잘하고 중국 사람이라고 쿵후를 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에 거주하는 흑인여성은 피부색에 더하여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까지 겪는다.
"너 진짜 섹시해. 난 흑인여자가 좋더라."
"섹스하기 좋은 엉덩이네."
"흑인은 피부가 진짜 부드럽고 매끈해."
'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겠지만 인종 불문하고 모든 여 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비슷한 차별을 한 번씩은 겪는다는 건 지구온난화 문제처럼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던 건 아닐까요?' 하고 저자는 물었다.
차별을 이야기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도 또 다른 차별이고 상처다.
"그게 무슨 차별이야? 때렸어? 욕을 했어?
"그 정도는 차별이 아닌 장난이야."
"그냥 둘 다 똑같아"
"(설마) 그런 사람이 어딨어?"
"세상의 아름다운 면만 보려고 노력해 봐."
"네가 원인을 제공한 점도 있는 듯."
"억울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 너가 뭘 한다고 쉽게 변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야. 철부지처럼 굴지 마
"오, 신기하다 그런 일이?"
"너만 그런 거 아니거든요. 우리나라만 그런 거 아님 외국은 더 심함. 세상에는 너보다 더 차별 대우받으면서 사는 사람이 많아 넌 행복한 줄 알라구 그 정도면."
"나도 그런 거 다 겪어봤는데 그건 별 것도 아냐."
"아 웃어서 미안한데 솔직히 웃김."
"그게 혐오면 다 조심하면서 살아야겠네 다 혐오가 될 수 있으니깐!"
"너 진짜 피곤하게 산다. 유난 떨지 말고 그냥 넘겨. 복잡하게 살지 마."
"모두가 그렇진 않아.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너무 일반화하는 건 아닌가 싶어."
'차별 자체에 공감하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겪었을 감정에 먼저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는 없을까?' "그런 일을 겪었구나. 많이 속상하겠네요" 같은 공감의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다.
차별이란 '어떤 사람들을 그룹으로 묶어서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는 모든 것'이며, '우리와 다른 너희를 인위적으로 대상화하고 따로 분류해서 비교한다는 개념'이라고 한다.
한 때 사회 구조와 제도를 바꾸는 것이, 그에 앞서 정치권력을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핵심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전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헬프』나 『그린북』,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의 흑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처럼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가 바뀌기 전에는 세상은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고 나면 다른 사람의 비슷한 행동 또한 의식이 되기 시작할 것이고, 그것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오고, 불편해지고, 그 불편함을 이해하게 되고 그렇게 변화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는 것, 혹은 작은 호기심, 작은 관심으로부터.
- 『지하철에서 옆자리에 흑인이 앉았다』중에서-
* 미국에 있을 적 거래처 이혼남 백인 W가 있었다. 그는 재혼은 동양여자와 하겠다고 했다.
이유는 동양여자들, 특히 일본과 한국여성들은 남편에게 순종적이고, 주말마다 골프를 쳐도 바가지를 긁지 않는다고 들었다는 것이었다.『지하철에서···』에서는 그런 식의 '동양 여자는 순종적'이라는 서양 남자들의 편견을 '옐로 피버'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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