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응달진 곳에 쌓인 눈이 며칠 째 녹지 않고 있다. 계속된 강추위 때문이다.
매일 하던 강변이나 호수 산책도 설날 이후 접고 집안에서만 머물렀다.
집에 있을수록 입이 궁금해진다. 이른바 '냉파'의 시간이다.
요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 나의 멘토인 곱단씨가 육수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야채육수, 고기육수, 멸치육수, 쌀을 씻은 뜨물까지 곱단씨의 말대로 육수는 모든 국물 있는 음식의 바탕이었다. 자주 만드는 것은 멸치육수이다. 보통은 요리를 만들 때 남은 짜투리 야채, 양파, 과일 갈비, 대파, 마늘 등도 함께 넣어 끓인다.
대가리 떼고 / 똥 빼고 / 대가리 떼고 / 똥빼고 / ······ / 국에 넣을 멸치 몸통을 / 다듬는다. // 차례를 기다리는 멸치 / 많기도 하다. / 똥 떼고 / 대가리 빼고 / 똥 떼고 / 대가리 빼고 / ······ // 몸통을 모아 놓은 데에 / 대가리와 똥 간다. / 대가리와 똥 모아 놓은 데에 / 몸통 간다.
- 이상교 , 「멸치 다듬기」-
육수는 된장국에 묵은지 무청 된장지짐에 도토리묵밥 국물에 사용되었다.
묵은지 된장지짐은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음식이다.
오래간만에 도토리묵을 쑤었다. 도토리 가루를 1 : 6의 비율로 물에 풀어 끓였다. 뻑뻑해질 때까지 끓이는 도중 소금과 들기름을 첨가했다. 예전엔 참기름을 넣었는데 방송에서 들기름을 넣으라고 해서 바꿨다. (*이전 글 참조 :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아내와 함께 만족한 음식은 딸아이네 가족을 만날 때 상에 올리게 된다.
다음번 음식은 도토리묵밥으로 정해졌다.
묵무침은 맛이 있었으나 짰다. 레시피대로 간장을 넣었는데 그랬다. 유명 호텔의 메인 셰프를 지낸 분이 식당 음식은 좀 짜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간이 짜면 맛있는데 좀 짜다'고 하는데 싱거우면 '맛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오른 레시피들도 그런 걸 닮아가는 걸까? 결국 입맛은 각자의 것이겠지만.
비엔나소시지. 내겐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라는 말이 익숙하다.
아내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초딩 입맛의 나는 언제나 좋다. 맥주를 부르는 맛이다.
냉동실의 불고기 용으로 있던 소고기로 바싹불고기를 만들었는데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내게 고기는 늘 '옳다'.
부드러운 맛에 먹는 감자와 채소, 달걀, 마요네즈로 만든 샐러드.
날이 풀리면 간만에 아내와 집 근처 중식당에 탕수육과 불맛 짬뽕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예전 아내가 부엌일을 전담할 때 여행이 좋은 한 가지 이유로 음식을 안 만들고 설거지를 안 해도 되는 걸 꼽은 적이 있다. 여행의 이유라기엔 좀 유치하지 않냐고 낄낄거렸지만 부엌을 맡으면서 가끔씩 나도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외식으로 한 끼를 건너뛰면 큰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한편으론 그럴 때마다 아내에게 미안해지곤 한다. 나는 옛날 직장에 다닌답시고 아내 일을 거의 도와주지 않았다. 물론 나는 아직 음식을 만드는 일이 물리지 않고 재미있다. 올해는 기존의 음식을 반복하는 대신에 새로운 음식들을 선보이겠다고 아내에게 공언을 했는데, '냉파'의 시기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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