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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소설 『천 개의 파랑』

by 장돌뱅이. 2023. 1. 14.

『천 개의 파랑』은 과학의 발전으로 효율적이고 기능적인 휴머노이드들이 은행원의 업무를 대신하고, 편의점을 관리하며, 소방구조대의 일도 대신하는 세상이 배경이다. 인간은 속절없이 일자리를 잃고 내몰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휴머노이드의 데이터 분석에 의존해야 하는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굴레에 갇혀서 산다.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로봇의 공격이나 반란이 아니라, 그들이 속한 세상이다.

소설은 오직 속도내기 위해 키워져 달리다가 어린 나이에 연골이 다닳아 안락사를 기다리고 있는 경주마 투데이와 투데이의 기수였다가 떨어져 파손되어 역시 용도 폐기를 기다리는 휴머노이드 콜리,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자매 은혜와 연재의 이야기다.

은혜는 어릴 적 바이러스 감염으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고, 연재는 가족들과 갈등으로 마음을 닫고 상처를 지닌 고등학생이다. 심지어 휴머노이드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마저 빼앗긴 상태다. 다친 경주마 투데이와 잘못(잘?) 만들어지고 사고로 파손까지 된 휴머노이드 콜리와 만남과 교감을 통해 자매는 각자의 대상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과도 화해에 이른다. 소설의 결말은 동화처럼 너무 '행복하게 잘 살았다'이다.

경이의 세계를 만들어 독자들이 몰입하게 하려면 작가가 먼저 설정한 세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부재한 상태에서 소재와 설정을 그저 나열하게되면 스토레텔링의 완성도 측면에서도 한계를 드러내지만, 결국 독자가 작가가 설정한 경이의 세계에 몰입할 수 없게 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생긴다.

소설 뒷부분 심사평에 나온 말로, 제4회 한국과학문화상에 응모한 작품 전반에 대한 평가이지만 나로서는 대상을 받은『천 개의 파랑』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할 지적으로 생각된다. 소설을 읽는동안 잘 몰입이 되지 않았다. 길이를 좀 줄이고 가지치기를 하여 이야기 전개의 속도감을 키웠으면 어땠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중학교 때 또래 친구들은 물론 동네 형들 사이에서 무협지가 인기가 많았다.
경공법이니 장풍이니 철사장이니 하는 무예 단어들이 일상의 대화 속에 자주 나와, 뭔가 싶어 나도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제목이 '정협지'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주위에서 떠드는 것만큼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실망해서 그뒤론 무협지를 읽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말을 했더니 아직 제대로된 무협지를 못 읽어서 그렇다고 비웃었다.

내가 특별히 조숙했다거나 고상했다는 자랑이 아니다.
무협지에는 시큰둥했지만 나는 중국 무술 영화에는 광적으로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경쾌하게 하늘을 나르며 은빛 검을 휘두르는 무사들의 이야기는 나의 SF(?) 판타지였다. '외팔이 시리즈'의 중국무술 영화 스타 왕우(王羽)는 우상이었다.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돌아온 외팔이', '외팔이와 맹협', '방랑의 결투', '단장의 검' 따위의 제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천 개의 파랑』은 나로서는 A.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이후로 두 번째 읽은 SF소설이다. 무협지와 중국 무술 영화 관계처럼 나는 SF소설 에는 인색하지만 SF영화는 좋아한다.
"인터스텔라", "인셉션", "아바타", "패신저스", "콘택트",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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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영화는 자주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미래를 그린다.
그런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사람들이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또 다른 희망을 찾아내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천 개의 파랑』은 "우리가 불행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삶이 이따금씩 의사를 묻지 않고 제멋대로 방향을 틀어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벽에 부딪혀 심한 상처가 난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 방향을 잡으면 그만인 일이라고. 우리에게 희망이 단 1%라고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근거없는 낙관은 퇴폐이지만 희망은 새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부한 사족(蛇足) 같기도 할 것이다.


(* 푸른색은 소설 속에서 인용 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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