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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인공지능 영화 두 편 - 『her』와『Ex Machina』

by 장돌뱅이. 2021. 1. 10.

2020년은 태어나 영화를 가장 많이 본 한 해였다. 그러면서도 극장을 한 번도 가지 않은 한 해였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다양화된 이유보다 코로나의 압박이 심해진 탓이다.

대형 화면과 성능 좋은 음향 시설을 갖춘 영화관의, 집중력이 보장된 환경에서 보아야 제대로 된 영화 감상을 할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코로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아내와 나를 집에 가두었다.
최근에 영화에 대한 짧은 감상을 자주 올리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은 적응하게 마련인지라 반복되다 보니 집에서 하는 영화 감상에 장점도 있었다.
영화를 보며 대화도 할 수 있고 간식을 먹는 것도 자유로웠다.
화면을 정지 시켜 놓고 잠깐 다른 일을 할 수 있고, 깜빡 놓친 장면이나 대사를 돌려볼 수도 있었다.
영화 한 편을 일박이일로 끊어 보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편안함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예전처럼 컴컴한 영화관에 앉는 일이 불편할 것도 같다.

영화 『her』의 테오도르는 다른 사람의 사랑을 전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이다. 그는 감미롭고 따사로운 감성의 언어로 편지를 받는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외롭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체계인 사만다를 구매한다. 차분하면서도 허스키한 여성 목소리의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사만다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면서 테오도르는 무기력에서 벗어나 삶의 활기를 되찾는다.

테오도르는 직장과 외출 등 일상의 대부분을 사만다와 함께하면서 '그녀의' 점차 존재를 특별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사만다는 물리적으로 '육체'를 가질 수 없는 프로그램일 뿐이고, 테오도르와 관계(대화)를 맺으면서도 동시에 8천 명이 넘는 다른 고객들과 연결되어 동일한 ''을 처리하는 인공 지능이란 상품에 불과하다.

her는 학습을 통해 6백여 명과 사랑의 감정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사만다의 인간화가 아닌 인간의 '사만다화'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테오도르가 남을 대신해서 대필 편지를 써주는 맞춤 서비스는 애초부터 자기 것이 아닌 감정을 투입할 수밖에 없는 기계적인 행위라는 점에서 데이터를 처리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 사만다와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정작 현실의 사랑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닿지 않는, 화려한 언어들의 계산적 조합을 찾는 알고리즘일 뿐인.

『Ex Machina』에는 인간형 인공지능으로 her』의 사만다보다 업그레이드된 에이바가 나온다.
사만다와는 달리 실물 '육체'가 있다.
세계 최대의 검색 엔진 기업의 회장이자 천재 개발자인 네이든이 개발한 여성 형상의 에이바는 인간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세밀한 감정 표현과 의사소통은 물론 심지어 섹스도 가능하다

 에이바의 생각과 의식이 진짜인지 아니면 프로그래밍 된 것인지 밝히는 테스트를 위해 선발된 주인공 칼렙은 테스트가 거듭되면서 에이바에 이성을 대할 때와 같은 감정이 생긴다.

마침내 "당신과 데이트 하고 싶어요"라는 에이바의 고백을 듣게 되자 칼렙은 네이든에게 묻는다.
“그녀가 날 좋아하도록 설정(programming)했나요?”
네이든이 답한다.
"남자를 좋아하게 프로그래밍했지. 자네가 여자를 좋아하게 프로그래밍이 됐듯이."
네이든의 말을 칼렙은 부정한다.
"난 프로그래밍이 된 게 아니에요."
그러나 네이든은 단호하다.
"자네도 프로그래밍된 거야. 자연과 부모에 의해."
혼란스러워진 칼렙은 자신도 인공지능의 휴머노이드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보기도 한다.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던가.
우리가 지닌 의식과 생각은 일차적으로 주위 환경과 인위적인 교육 등에 의해 비롯된다.
거기에 본능과 자율 의지와의 길항을 통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것을 네이든처럼 '프로그램되었다'고 부른다면 그리 반발할 일은 아니다.
다만 칼렙이 에이바처럼 과학적 휴머노이드가 아닌 것을 피를 흘려가면 확인한다 하더라도, 거대 자본으로 상징되는 네이든의 냉철한 제한과 관리의 대상일 뿐인 '사회적 휴머노이드'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컴퓨터가 우리에게 『터미네이터』를 불러올지, 아니면 우리를 『매트릭스』 속에서 살게 할지, 혹은 『블레이드 러너』를 필요로 하게 될지 나는 영화 이상으로 상상하거나 아는 게 없다. 어느 학자가 "문제는 지적인 기계가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느냐가 아니라, 기계가 아무런 감정 없이 지능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네이든처럼 아무런 인간적 감정 없이 기계를 다룰 수 있는 자본의 본능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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