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궁궐은 다른 도시와 가장 크게 구별되는 서울만의 역사이자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서울에 살면서 여러 차례 궁궐을 다녀왔다. 그때그때 이런저런 건물의 배치와 역할 따위를 책과 안내판을 통해 알아보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원을 걷는 것과 같은 산책의 개념이었다. 정작 건물의 이름에 대해 크게 생각해보진 않았다.
올해는 아내와 서울 시내 궁궐을 돌며 현판과 기둥에 붙은 주련(柱聯)을 알아볼 계획을 세웠다.
문화재청이 발행한 『궁궐의 현판과 주련』은 "궁궐은 조선조 문화의 절대적 공간이었다. 그래서 궁궐 건물의 공간 구조와 각 건물의 역할과 명칭에는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유교 이념의 기초가 보편적 이성인 천명에 기초한 덕치주의, 음양오행에 기초한 자연관, 민심을 천심으로 삼는 민본주의라면 궁궐의 현판에는 이러한 유교적 이념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이처럼 현판은 그 건물의 고유 이름표 이면서 해당 건물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판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는 궁궐 문화를 제대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정조는 「경희궁지(慶熙宮誌)」에 이렇게 썼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보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는 곳이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곤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존재를 드러내는 제일 첫 번째의 정체성이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고 알아주고 다른 존재와 구별해 주는 일은 누군가 혹은 어느 것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기도 할 것이다.
또 "주련은 한시 구절이나 단편적인 산문 들을 널판지에 양각 또는 음각으로 새기거나 써서 전통 한옥의 기둥에 걸어 놓은 장식물이다. 주련의 내용은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것,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기원하는 것,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것 등 다양하다. 여기에 쓰이는 글귀는 옛날부터 전하는 시문을 많이 이용하는데, 때로는 새롭게 창작한 것을 새겨 넣기도 한다. 주련의 글씨는 선대(先代)의 유명 서가(書家)나 당대의 명필들이 쓴 것을 새겨서 예술작품으로써의 가치도 지닌다"고 했다.
나의 한자와 한문이야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아니 새를 보고 을(乙)자도 모르는 수준이다. 독자적인 해석과 감상은 불가능한 지라 참고할 책을 들고 현판이나 주련과 대조해 가며 읽어볼 생각이다.
덕수궁 정문에서부터 돌담길을 따라 정동사거리 쪽으로 걸었다. 서울에서 이만큼 걷기에 좋은 길이 있을까 싶다. 아내와 젊은 시절처럼 팔짱을 끼고 걸으며 복고풍(?) 낭만을 느껴보고 싶어지는 길이다.
이 길을 걷는 연인은 헤어지게 된다는 속설이 어째서 생겨났는 모르겠다. 아름다움에 대한 역설적 표현일까? 시샘일까? 하지만 아내와 수십 번 걸었어도 40년 가까이 잘 살고 있다.
돌담길을 따라 늘어선 나무마다 털실 쉐타를 입은 호사스러운(?) 풍경은 뜻밖이었다.
헐벗은 나무들에 대한 사람들의관심과 보살핌에 차가운 겨울 날씨도 한결 누그러지는 듯했다.
경희궁(慶熙宮)은 덕수궁 돌담길의 끝, 새문안로 건너편에 있다. '경희'는 '경사스럽고 화락하다'는 의미다. 1617 (광해군 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광해군 15)년에 완성되었다. 처음엔 경덕궁이라 불렀으나 1760(영조 36)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의 시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며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라고 한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창덕궁·창경궁의 동궐(東闕)에 대비된다.
경희궁은 서울의 어느 다른 궁궐에도 뒤지지 않는 정치적 비중을 지닌 궁궐이었다. 이곳에서 숙종과 경종이 태어났고 경종, 정조, 헌종 즉위했으며 다른 여러 왕과 왕후가 승하한 곳이다. 위「채색 서궐도」에서 보듯 규모도 대단했으나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는 이곳에 학교를 세웠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1987년부터 발굴, 복원이 시작되어 2002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물론 완벽한 복원이 아닌 경희궁의 정전 구역인 숭정전 일부(위 그림 중 ○ 부분)만을 복원한 것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은 원래 지금의 구세군빌딩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 사당을 만들기 위해 지금의 신라호텔 근처로 떼어갔다. 이후 복원사업이 진행되어 다시 제자리로 옮겨오려 했지만 이미 구세군 빌딩이 자리 잡고 있어 지금의 현재의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다. '흥화'는 '교화를 북돋우다'라는 의미다.
숭정문(崇政門)은 경의궁의 정전(正殿)인 숭정전의 남쪽 문이다.
'숭정'은 '정사를 드높인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경종과 정조, 그리고 헌종이 즉위식을 치렀다고 한다.
숭정전(崇政殿)은 신하들의 조회를 받는 곳으로 경희궁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원래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남산 기슭의 일본인 사찰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 안에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숭정전은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태녕전(泰寧殿)의 '태녕'은 '형통하고 평안하다'는 의미로 임금의 초상화를 받들어 안치하던 건물이다. 모신 임금의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겠다.
현재의 현판은 조선 명필 한석봉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희궁엔 후전(後殿)이자 편전(便殿)인 자정전(資政殿 : 정사를 돕는다는 뜻)과 우물터인 용비천(龍飛泉)이 있다. 다른 궁궐에 비해 작은 규모라 널리 알려지지 않아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추운 겨울이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관리 탓인지 경희궁은 어딘가 쓸쓸하고 허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복원사업이 더 진전되면 괜찮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논어에 "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博學而篤志), 절실히 묻고 현실의 가까운 일들을 생각하면(切問而近思),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仁在其中矣)"고 했다. 그렇게 거창한 의미까지 끌어다 붙일 일은 아니지만, 아내와 함께 궁궐의 처마 아래 앉아 현판이나 주련에서 배우고 묻고 생각하게 되는, 노년의 서둘 것 없는 시간에도 혹 인(仁)이라는 것이 더러 기웃거릴 수도 있지 않을까?
본격적인 걸음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날이 풀리는 새봄을 기다려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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