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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영화 <<더원더>>와 <<교섭>>

by 장돌뱅이. 2023. 2. 26.

1862년, 대기근 직후 황폐해진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 무려 넉 달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고도 생존해 있다는 애나라는 소녀가  살고 있다. 애나의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이를 하느님의 기적으로 광고하고 이를 보기 위한 방문객들이 마을로 몰려들었다. 간호사 엘리자베스는 소녀의 의학적 상황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고 파견된다. 

엘리자베스는 금식의 이면에 어린 애나가 겪은 아픈 과거와 그녀에게 강요된 죄의식과 왜곡된 구원의 논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기적은 없었고 인간의 이기심을 포장한 거짓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을 원로나 종교계의 누구도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에게 종교는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용하기 때문에 필요한 도구였다. 

마침내 엘리자베스는 애나와 탈출을 감행한다.
기적은 애나를 살리기 위한 엘리자베스의 헌신적인 고군분투에 있었다. 그것은 간단히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더원더>>는 실화에 근거했다고 한다.

미국에 주재하던 어느 일요일 성당 미사를 보고 한인마트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교회 다니세요?"
말끔한 차림의 중년 여성이 다가와 물었다.
"예, 성당에 다닙니다." 
아내와 나는 이 말에 여자가 '열심히 다니세요'하며 돌아설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더 바싹 다가와 종교철학과 학기말 고사 같은 심오한, 하지만 마트  주차장에서 주고받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성당에 다니셔도 구원의 확신은 있으세요?" 
예상밖의 시험문제에 아내와 내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여자는 읽어보라며 선교 전단지 몇 장을 내 차 트렁크에 올려놓고서야 돌아섰다.

영화 <<교섭>>은 그 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십여 년 전 이슬람의 나라 아프가니스탄 에 회개하고 기독교를 믿으라는 '광야의 외침'을 던지러 갔다가 탈레반에게 납치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그 무렵 택시를 탔다가 한 기사아저씨를 만났다. 라디오에서 그들 피랍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택시 안이란 말없이 가기에는 어색한 공간이기도 해서 혼자 말인 듯, 기사아저씨에게 건네는 듯, 말을 꺼냈다.

"걱정이네요. 무사히 풀려나야 할 텐데 ······ 말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뭐, 예수님 사업을 하다가 순교를 하면 영광이죠."
당시 정부에서 여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한 아프가니스탄에 굳이 선교라는 고집을 피우며 가서 문제에 휘말린 사람들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었기에 나는 그가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행동은 한심하지만 그래도 어찌 되었건 사람 생명을 살리고 봐야죠."
나의 말에 그는 정색을 했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 행동을 잘못된 게 아니에요. 그들 행동을 막은 놈들이 나쁜 놈들이고 악마죠. 세상에 별 의미 없이 한심하게 살다가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거 비하면 설혹 저기서 죽어도 의미 있는 죽음이죠. 살든 죽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저도 교회에 다니거든요."

나는 놀라서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되물었고 그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러고 보니 차 안엔 종교 관련 소품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가 이해하는 교리와 확신이 총을 든 탈레반과 다를 바 없어 보여 놀랍고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고 신은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할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이 그가 지닌 확신의 껍질을 깨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자식들도 그 (영광스러운) 곳에 보낼 수 있으세요?"라고 차마 묻지 못하고 내리고 말았다.

이국의 주차장에서 '구원의 확신'을 강요하던 여인과 아프가니스탄에서 비극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택시 기사아저씨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화 <<교섭>> 속에 나오는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리와 한국인 통역이 대신해주었다.

아프가니스탄 관리 : "정말 (그 사람들) 죄가 없을까요?"
통역 : "아이 씨··· 진짜 그 인간들 여기 왜 와가지고 애먼 사람 개고생 시키냐고··· 진짜!"

이 두 마디를 빼면 영화는 껄렁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이면과 의미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종교 교리에 매몰된 된 오만이나 무모한 선교 방식에 대한 고발도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 한 사람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외교관과 국정원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 많이 오글거린다. 차라리 납치범들을 응징하고 인질들을 구해내는 '람보'식의 '미션임파서블'을 보여주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다.

혹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당시에 나는 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반대의 입장과 상관없이 그들의 무사귀환을 간절해 바랐음을 밝혀둔다.

*이전 글 : 탈레반에게 1

 

탈레반에게1

*2007 여름 아프간에서 한국인 이십 여명이 탈레반에게 납치 되었다. 그즈음에 쓴 글이다. 아직 우리 정부에 의해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또 한명의 한국인 인질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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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 : 탈레반에게 2

 

탈레반에게2

아픔이 있었지만, 아직 고통 속에 남아있는 분들의 무사 귀환을 빌면서, 세계일보에 실렸던 소설가 방현석의 글에 내 마음도 포개봅니다. "탈레반에게 보내는 편지 탈레반의 전사 여러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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