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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by 장돌뱅이. 2023. 2. 27.

아내의 오래된 신발을 버리다 생각난 시.

눈이 동그랗거나 아니면 코가 오뚝해서, 혹은 신발이 예쁘거나 비싼 외투를 입었다는 단편적인 이유만으로 누구를 사랑하진 않는다. 사랑은 총체적인 것이고 그래서 상대의 진귀함뿐만 아니라 발톱 밑 박테리아의 콧털까지 사랑하는 것이고,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 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늘 시만큼 달콤하게 아내를 대하며 살지는 못한다.
반성의 의미를 포함하며 시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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