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친일 그리고 그후

by 장돌뱅이. 2023. 3. 4.

삼일절이라 그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라는 텔레비전 프로에서 한 독립운동가와 그를 고문했던 일제 형사의 악연을 방송했다. 

1942년 17세의 소년이었던 이광우는 친구들과 항일전단을 뿌리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다. 경남 경찰부로 끌려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구타에 물고문으로 근육이 파열되고 무릎이 탈골되었다. 고문을 하는 사람에게 그만 때리라는 뜻으로 '아버지'라고까지 부르며 매달려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를 고문한 형사는 일본인이 아니라 하판락(河判洛)이라는 조선인이었다. 10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끝에 재판에 넘겨져  8·15해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나기까지 2년 5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하판락과 이광우가 다시 만난 곳은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정에서였다. 그러나 하판락은 이광우를 모른 척했고 더군다나 고문 사실은 부인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하판락(카와모토 마사오 河本正夫)이 올라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판락은 1912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났다. 1932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34년 순사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경남 순사로 임명되어 사천과 삼천포 등지에서 근무를 하다 1939년 도경부 및 도경부보 시험에 합격했다. 1941년 경남 경찰부 고등경찰과 순사부장으로 승진한 그는 1943년 3월 부산에서 일제의 침략전쟁 반대를 목적으로 친우회(親友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의 군사시설과 군수공장 파괴 등을 추진하고 침탈상과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전단을 제작 살포하던 이광우 여경수 등을 체고 고문했다.
해방 후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1949년 반미특위에 체포되어 공판이 진행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56년에 경남 도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그 뒤엔 부산에서 금융업과 목재업에  종사했다. 2000년 한 신문 인터뷰에서는 "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2003년 91세로 사망했다."

어떤 식으로 미화를 하건 식민지의 본질은 식민 본국에 의한 수탈과 폭력이다. 자원 획득과 상품판매 시장을 위한 식민지 강점과 경영의 전 과정은 오직 물리적 폭력을 바탕으로 한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은 우리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내적 모순을 식민지에 전가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행사한 폭력의 결과다. 개인간이건 국가간이건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식민지 매판세력은 이 폭력의 하수인이다. 그들은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일부는 식민통치기구 참여로 폭력을 기획하고 관리한다.
우리의 경우 그들을 친일파라고 부른다.

하판락의 행위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는 결코 무마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였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폭력이었다. 친일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혹은 '그때는 다 그랬다'고 터무니없이 일반화시키거나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 유야무야로 얼버무리는 궤변에,  이 자발성과 적극성은 하나의 기준이 된다. 유명 소설가이자 대표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이광수)가 스스로 밝힌 창씨개명 내력도 그렇다. 

지금으로부터 2천6백년 전 신무천황(神武天皇, 일본의1대천황)께옵서 어(御)즉위를 하신 곳이 橿原(가시하라)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香久山(고큐산)입니다. 뜻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어 '香山'이라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光'자를 붙이고 '洙'자는 內地식의 '郞'으로  고치어 '香山光郞'으로 한 것입니다.
- "매일신보", 40년 1월 5일 -

일제의 강요로  최(崔)아무개 씨가 자신의 성을 파자(破字)하여  '가야마(佳山) 상' 이 되는 정도의 일반인들로서는 가히 상상하기 힘든 심오함(?)이며 비교할 수 없는 자발성과 적극성이다. "금후의 조선의 민족운동은 황민화 운동"이라고 단언하며 '뼈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했던 가야마 미쓰로가 조선 청년들을 의미 없는 전쟁의 사지로 내모는 연설을 하고 글을 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겠다.

그런 香山光郞이 해방 후에 사람들에게 '살아남았으니' 당신들도 결국 일본에 협력한 것  아니냐는 투의 글을 썼다. 이 경악할 만한 사실은 우리 현대사가  친일파 청산이라는 역사적 숙제를 풀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오늘 우리 사회의 혼란이 많은 부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친일파의 실체 파악과  청산은 개인적 죄상에 대한 단죄의 문제이기에 앞서 식민지 지배의 참담한 실체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대로 역사적 비판마저 결여되는 한, 후세에 대해서 민족정기를 증명할 길 없다는, 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숙제가 되는 것"이라고  임종국 씨는『실록 친일파』에서 말했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라 이름 보고 고른 영화들  (0) 2023.03.10
뗏목을 버린 후에  (0) 2023.03.08
친구들은 자란다  (0) 2023.03.01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0) 2023.02.27
영화 <<더원더>>와 <<교섭>>  (0) 2023.02.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