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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정지아 소설집『나의 아름다운 날들』

by 장돌뱅이. 2023. 3. 30.

한 여행동아리에서 어떤 회원이 "한 번은 해볼 만하다는 것들은 대개 한 번도 안 해도 되는 것들"이라고 했다. 여행을 가서 한 번은 먹어볼 만하다는 음식은 한 번도 안 먹어도 되고, 한 번은 가볼 만하다는 곳은 한 번도 안 가봐도 무방하다는 주장이었다. 긍정인 듯 부정적인 느낌이 있는 이 말은 처음 들었을 때 꽤나 합리적인 여행을 위한 팁처럼 들렸다.
내가 직접 해볼 때까지는 그 '한 번'의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시차적 허점은 있었지만.  

정지아의 『나의 아름다운 날들』에는 11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다.
소설 제목에 나오는 '천국', '브라보', '럭키', '즐거운', '아름다운', '절정' 등의 단어가 띄우는 밝은 분위기는 실제 내용에선 정반대로 그려진다. 여행팁처럼 '한 번은 해볼 만'한 것들이라 안 해도 되는 것이기는커녕 단 한 번도 그렇게 하기(살기)는 싫은, 돌이킬 수 없이 '한 번뿐'이어서 치명적이고 아픈' 삶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아내 발가락 사이의 점 하나까지 애틋하고 좋았는디 아내가 맘에 품은 것은 내가 아니라 되련님'이었던, 되련님을 죽어도 좋을 신념이고 견고한 신앙으로 받아들인 아내 곁에서 일생을 '고삐 매인 소인 양' 맴돈 사내.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혼자 돌보는, '제 몸 하나 일으켜 세우는 일이 우주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마흔 가까운 나이의 장애인 아들.
베트남에서 시집을 와 걸핏하면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인.
하루가 천년처럼 더디 새고 더디 저무는 폭폭하고 징글징글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늙은 어머니.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아들의 재활을 꿈꾸며  23년간이나 포기하지 않고 돌보는 노부부.
'대를 잇기 위해 아들놈을 고향에 붙들어 앉힌 것인데, 바로 그 때문에 대가 끊기게' 되자 우여곡절 끝에 이국의 며느리에게서 얻게된 '얼굴 까만 손주'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시아버지.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짓밟은 사상이란 것이 눈앞에서 실감으로 무너지'는 세상에서 자기 몫의 허무를 감당해야 하는 노인들. 
'벼룩처럼 들러붙어 등골을 뽑아먹는 자식들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지게를 내던지고' 싶던 고된 농사일 끝에 발견한, 밭고랑에 주먹만 한 돌 하나를 치우려다가 시작된 ( 그가 생명을 준 거대한 의미일 수도 있고 그냥 기이하게 생긴 돌덩어리일 수도 있는) 거대한 바위 캐기에 비현실적으로 투신하는 농부.
전원생활을 꿈꾸며 농촌에 내 집 한 칸 지으려다가 '가나안을 향한 모세의 행군 그 이상'의 고난을 맞이하는 전직 기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 늪처럼 고인 시간 속에서 부유하는',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는 말도 잊어가는 무기력한 노숙자.

그럼에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읽는 동안  가슴을 짓눌러왔던  모질고 각박한 삶이 주는  압박감에서 다소나마 벗어날 수 있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은 정지아의 소설이 가진 힘이다. 책 말미에 붙은 해설에서는 "나락이다 싶을 때마다 더 깊은 나락을 보여주는 생의 잔인함에 주눅 들지 않고, 여전히 우리 앞에 끝나지 않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것이야말로 따스한 이야기꾼 정지아의 변치 않는 매혹"이라고 했다.

다만 시간과 자의식의 밀도가 엷어지는 인생 황혼기의 여유와 자유를 핑계로 지난 시절의 선택이 지닌 절박했던 진실마저 평준화시키는 일은 경계해야겠다. 세월이 흐른 만큼 진실의 폭을 넓혀 생을 반추할 수는 있겠지만 흔적조차 희미해지도록 일반적인 도덕론으로 '물타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소설은 「목욕 가는 날」이었다.
큰 갈등과 해소의 극적인 과정이 없으면서도 어머니와 두 자매가 함께 목욕을 하러 가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힘차고 유쾌하다. 언뜻언뜻 마음을 저미게도 하다간 종내는 한바탕 축제처럼 신명을 불러온다. 

언니가 때 미는 사람처럼 양손에 때수건을 끼고는 짝짝 경쾌하게 손뼉을 쳤다.
"등이나 대그라. 엄마도 돌아앉으씨요. 나는 야 밀고 야는 엄마 밀고, 그라문 쓰겄네. "
망설이다가 나는 돌아앉았다. 누구에게 맨등을 보이고 돌아앉았던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잠시 생각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니의 손끝도 제법 야무졌다. 샤워타월로 대충 혼자 닦기만 했던 등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워매! 가시내야. 니는 때도 안 밀고 사냐? 무슨 놈의 때가 국수가닥도 아니고 우동면발이네 그랴."
"그만, 그만하소. 아파 죽겄네."
언니가 착 소리가 나게 내 등짝을 후려쳤다.
"애도 아니고 엄살은. 쫌 참아. 누가 니 껍질 벳길까비? 밀 때는 따끔따끔 혀도 밀고 나면 월매나 시원헌디. 하기야 때를 밀어봤어야 알제. 니, 목욕탕, 크고 난 뒤 첨이제?"
수십 년 묵은 때가 타일 바닥 위로 툭툭 떨어지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언니 말대로 아프면서도 시원했다. (···) 나도 때수건을 들고 언니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언니의 등은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오늘은 싹퉁머리 없고 인정머리 없는 나를 위해 언니가 준비한 특별한 날이었다. 어쩌면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어머니를 위한 날일 수도 있었다. 아무렴 어떤가. 오늘은 어머니도 나도 언니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상대에 대한 두둑한 신뢰감으로 가식 없는 나의 뒷모습을 편하게 보이는 일, 언제였던가 오래된 기억이다. 언니의 헌걸찬 언행이 생의 잡다한 찌꺼기들을 시원스럽게 거두어 읽는 나도 잠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내친김에 오늘은 나도 목욕이나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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