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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중국

1997홍콩2 - 홍콩에 대한 기억2

by 장돌뱅이. 2012. 5. 29.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가면 홍콩은, 아니 홍콩이란 말은 박노식, 허장강 등이 주연한 액션 영화 속에서 떠오른다.
깊게 눌러 쓴 모자와 검은 선글라스, 깃을 세운 바바리코트, 정체불명의 사나이들, 어두운 뒷골목을 뛰어가는 긴박한 발자국 소리들.....뭐 그런 것들이다. 비가 죽죽 내리는 듯한 낡은 화면 속에서 주로 '천인공노 할 북괴 간첩'과 '정의의 남한 첩보원' 사이의 주먹질과 총격전의 주된 내용이었다.  

중학교 땐 홍콩하면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라는 무협영화의 주인공 왕우를 떠올렸고 나중엔 이소룡과 성룡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홍콩은 내게 최초로 영화 때문에 기억에 남게 되었는가 보다.

영화배우 허준호의 부친인 허장강씨는 악역 전문 배우였는데 그를 흉내낼 때 사용하는 단골 멘트에도 홍콩이 나온다.
"어-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이번에 홍콩에서 라이타돌 한 가마니만 들어오면 내 호강시켜 줄게."
이처럼 밀수나 가짜 상표를 의미할 때도 홍콩은 자주 거론되었다..
품위 있는 표현은 못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황홀한 일이 있었다는 걸 '홍콩 갔다 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쨌든 홍콩은 우리의 일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스며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홍콩은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옛날부터 내게 아주 가깝고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도 속에서 구룡반도라는 지명을 발견하곤 아홉 마리의 용이 거대하게
용틀임하는 모양을 상상하기도 했다.
이 지명때문에라도 홍콩은 언젠가 한번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내게 남게 되었다.

중국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 홍콩은 무역쟁이들 사이에 중국 본토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 기지쯤으로 생각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급하게 중국으로 출장 갈 일이 생기면 신속하게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홍콩을 경유하기도 했다.
나의 첫 홍콩 경험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지금은 잘 상상이 가질 않겠지만 그 당시에는 중국 상해를 가기 위해서 먼 홍콩으로 돌아가는 일이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현재 홍콩의 국제공항은 98년 7월에 개항한 최신 설비의 거대한 첵랍콕공항이지만 당시는 홍콩이라는 화려한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한’ 카이탁 공항이었다.
이 비행장은 활주로의 길이가 짧아 세계에서 위험한 공항 중의 하나였다. 착륙을 위해서 비행기는 홍콩 상공을 여러 차례 선회하며 아파트 지붕 위를 스치듯 위험스럽게 날아 굉음과 함께 착륙하곤 하였다. 브레이크 조정을 잘못한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나 바다로 직행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나의 홍콩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나의 첫 홍콩행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홍콩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처럼 화려하기는커녕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아파트 건물의 우중충한 모습이었다. 멀리 홍콩섬 쪽으로는 사진에서처럼 높다란 건물들이 일부 깨끗하게 보였다. 그러나 비행기가 나는 구룡쪽은 지저분한 모습의 건물들만 여유없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이 도시는 건물을 지을 때 일조권이라는 것을 고려하는 것일까?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지어진 수십 층의 건물들이 숨을 턱 막히게 하였다.
이 작은 도시의 비싼 땅위에 건물을 짓다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이해를 해봤지만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턱없이 홍콩에 사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여러번 업무차 홍콩을 지나가거나 방문하였지만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홍콩은 필요한 일만 보고 잽싸게 빠져 나오는 '히트 앤드 런' 작전의 출장지로 생각했을 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한 홍콩인에게 말하자 그는 웃으며 "홍콩의 모습이 초행자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겠고, 그런 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홍콩에 살거나 홍콩을 오래 경험하다보면 홍콩이 아주 기능적인 도시고 매우 편리한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거리의 건물(사이)마다 숨겨져 있는 'THE OTHER SIDE OF HONGKONG'을 느끼게 되면 홍콩은 거대한 매력 덩어리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홍콩에 발을 디딘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홍콩인의 말처럼 홍콩의 매력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던 것일까?
나는 드디어 출장 마지막 날에 맞춰 식구들을 홍콩으로 급작스레 불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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