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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서촌 문학기행

by 장돌뱅이. 2023. 4. 29.

작년에 가입한 독서 토론 모임 "동네북(BOOK)"에서 서울 서촌으로 문학기행(산책)을 다녀왔다.
나로서는 줌(ZOOM)으로만 만나던 회원들을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안내는 시인 문기봉 님께서 해주셨고 5명의 회원이 함께 했다.

첫 방문지는 경복궁 서쪽 담장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보안여관"이었다.
입구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1936년에 지어진 목조 여관 건물인 통의동보안여관은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이 만들어진 곳으로 한국근대문학의 발상지이며, 2004년까지 실제 여관으로 많은 문화예술인이 머물렀던 생활유적이다.

『시인부락』은 1936년 서정주가 발행인겸 편집인을 맡고 오장환, 김광균, 함형수 등이 참가하여 창간한 시(詩) 동인지이다. 1937년 12월 통권 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지만 구성원들은 이후 저마다의 개성 있는 시를 활발하게 발표하며 우리 근현대 문학사를 풍성하게 했다. 

보안여관은 현재 옆에 지어진 4층의 아트스페이스 건물과 함께 전시장, 책방, 카페 등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문이 잠겨 있었다.

"이상의 집"은 커다란 창이 있는 깔끔한 카페처럼 꾸며져 있었다. 행사가 있어 내부 출입이 불가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지만 여행에서(?) 아쉬움은 재방문의 합당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앞에서 잠시 요절한 시인에 대해 안내자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할 수 있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상(본명 김해경)은 1936년 변동림(卞東琳)과 결혼을 했다. 변동림은 경기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이상은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라며 프러포즈(협박?)를 하여 결혼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은 결혼 4개월 만에 일본으로 떠나 이듬해 도쿄에서 27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변동림은 임종을 지키고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후 1944년 변동림은 화가 김환기와 재혼을 하고 이름을 김향안(金鄕岸)으로 바꾸었다.1974년 김환기 화백의 죽음 이후 김향안은 남편의 작품을 관리하면서 1978년 환기 재단을 설립하고 1992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우고 2004년 세상을 떠났다. 김향안은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하여 미술사와 미술평론을 공부했고 귀국 후에는 대학교수직을 제안받기도 했지만 그냥 김환기의 아내로 그의 예술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김향안이 아니었으면 김환기가 없었다고 말한다.(이상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권』 참조 요약) 

학창 시절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려운 시로 우리를 괴롭혔던 시인 이상.
시가 어려우니 시에 대한 자습서의 해설도 어려웠다. 지금도 그의 시가 나는 어렵다.
그래서인지 시인 이상이 아닌 소설가 이상이 친근감이 있게 다가온다. 그의 소설 「날개」의 마지막 부분은 반드시 그가 살았던 일제강점기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긴 여운을 남긴다. 젊은 시절 혹은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그와  비슷하게 외쳐보고 싶은 순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대오서점"은 1951년 문을 열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라고 한다. 마당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계획이었지만 이곳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나로서는 한 달 전쯤 아내와 왔을 때도 그랬기에 '삼고초려'의 공덕을 쌓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수성동 계곡으로 오르는 언덕길에 있는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 터.
그의 시가 담은 이미지처럼 '모자를 비스듬히 스는 일도 없고, 교복의 단추를 기울어지게 달지도 않았으며, 신발은 언제나 깨끗'했다는 윤동주가 짧았지만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다. 

(하숙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 우리는 김송 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우리는 대청에서 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성악가인 그의 부인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듣기도 했다.

- 윤동주의 후배이자 친구였던 정병욱의 글 중에서 -

*겸제 정선 「수성동(水聲洞)」, 29.5 x 33.7cm

조선후기 수도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지방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수성동을 소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인왕산 기슭에 있으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시내와 암석이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가 좋다. 혹은 이르기를 이 골짜기가 비해당(匪懈堂)의 옛 집터라 한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인왕산록에 있으니 골짜기가 깊고 그윽하자. 곧 비해당의 옛 집터로, 시내와 바위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에 마땅하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고 한다.

'게으를 수 없다'는 뜻의 비해당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집을 말한다.  안평대군은 시 ·문·서·화·금·기(詩文書畵琴棋, 시, 산문, 글씨, 그림, 거문고, 바둑), 이른바 육절(六絶)의 풍류대가였으므로 그의 안목으로 잡은 집터는 도성 안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일컬을 만한 자리였을 것이다. 

겸제의 그림에는 계곡에 걸친 다리를 건넌 세 명의 선비가 보인다.
동자 한 명을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온 듯하다. 긴 지팡이를 짚고 앞장선 이가 행중의 존장인 듯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마치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문기봉 선생님 같다.

문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수성동 계곡을 바라보았다. 물이 말라있지만 장마철에 엄청난 물이 내려올 것 같은 커다란 바위 계곡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을 이름이 '물소리(水聲)'인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 위에 걸친 돌다리는 겸제의 그림을 참고로 복원한 기린교라고 한다. 멀리 인왕산이 배경으로 떠있고 계곡 좌우로는 소나무들이 옛 그림처럼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수성동 계곡에서 청운문학도서관을 찾아가는 길은 만만찮았다. 길을 잘못들어 여기저기를 헤맨 탓이다. 그래도 곳곳에 쉼터와 인왕산에 스민 사람들의 자취를 설명해 놓아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도서관에서는 지하에 있는 열람실에 들어가는 대신에 본채 그늘에 앉아 작은 인공 폭포 옆에 지어진  아담한 정자를 보며 쉬었다. 봄이 다 가기 전에 아내와 다시 와서 그 정자 안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폭포를 바라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윤동주라는 이름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할 뿐인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반성을 일깨운다.
일본 문제가 자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요즈음이다. 순결한 정신의 시인이 죽음에 이르도록 폭력을 행사한 그들이 어떤 진정한 사과도 없는 한 그것은 백년 전의 일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의 일이다. 

일제강점라는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잔인한 시기에 윤동주는 언젠가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려야 할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순교자적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마오.

- 「무서운 시간」(1941년 2월 7일) -

문학관 1층 바닥에 쓰여있던 시 「흰 그림자」는 우리에게 '황혼이 짙어가는 길목에서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게 살고 있는가 묻는 것도 같다.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검의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든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는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를
연연히 사랑하든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 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으젓한 양처럼
하루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1942년 4월 14일)

언제나 '본론'보다 뒤풀이를 좋아하는,  술보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나.
낙지전골과 광화문 막걸리로 짧은 문학기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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