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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기차는 8시에 떠나네

by 장돌뱅이. 2023. 11. 1.

손자저하가 졸음에 끝까지 저항을 하다 잠이 든 오후.
갑자기 찾아온 적막이 깊다. 11월 첫날이니 가을도 깊은 듯 여기저기 단풍이 절정이다.
문득 쓸쓸하고(해서) 감미로운 분위기의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그리스 노래  <기차는 8시에 떠나네(To Treno Fevgi Stis Ochto)>.
2차 세계대전 때 그리스를 침공한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저항군으로  떠난 애인은 전쟁 끝난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향에 남은 여인은 날마다 기차역에 나가 애인의 귀환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그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그린 노래다. 그리스 시인이자 작사가인 마노스 엘레프테리우(Manos Eleftheriou)가 실제 있었던 일을 듣고 가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카테리나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나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작곡은 유명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가 했다.
그는 "음악의 의미는 바로 폭탄"이며, 그 강력한 에너지를 "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조국 그리스의 비극이 있는 곳에"  "더욱 높은 강도로 사용하려고 한다"는 음악관을 가졌다. 현실 정치에 헌신적으로 참여해온 그는 1967년 4월 발생한 우익 군사 쿠데타 정권에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1970년 풀려난 이후에는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 망명 생활을 하며 음악을  무기로 그리스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당시에 그의 모든 음악은 '당연히' 그리스 안에서 금지곡이 되었다.

나는
테오도라키스 를 프랑스의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1969년에 만든 영화 <<Z>>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리스 정치 상황을 다룬 이 영화는 칸영화제 상,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상을 받는 등 세계적인 수작으로 평가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20년이 지난 1989년에야 공개되었다. 테오도라키스는 이 영화의 배경음악을 맡았다. 음악에 대한 평가는 나의 능력 밖의 일이고 영화의 내용은 이제 거의 잊었지만 영화를 보며 유달리 음악에도 귀를 기울이며 한 그리스 사내의 삶을 생각해보던 기억은 남아있다.
2000년 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도 테오도라키스가 독재정권에 맞서다가 죽은 동료들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구태여 그리스 상황에 한정 지어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뜻하지 않은 이별,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덧없는 세월, 잃어버린 꿈, 가버린 젊음, 아니면 최백호의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 나오는 모든 '다시 못 올 것'들을 '낭만처럼' 생각하며 들어도 되겠다. 노랫말 속 기차가 떠나는 8시(왠지 저녁 시간일 것 같은)와 일년 중 11월은 비슷한 느낌이다.
가야할 시간보다 지나온 시간이 많은
······ 
그러다 조금은 쓸쓸해진들 또 어떠랴.
'쓸쓸해지면 마음이 선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위 영상은 그리스 가수 아그네스 발차(Agenes Baltsa)가 부른 것이지만 원래는 테오도라키스와 가까웠던 마리아 파란투리(Maria Faranturi )라는 가수가 불렀다고 한다. 유명한 노래다 보니 유튜브에는 여러 가수들이 부른 영상이 올라있고 그중에는 우리나라 가수 조수미 씨가 부른 것도 있다.

아래 영상은 미국 밴드 "The Walkabouts"가 연주한 경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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