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년' 만에 울산에 가기 위해 '백만 년' 만에 고속버스를 탔다. 옛 직원 자녀의 결혼식 참석 차였다.
KTX를 탈까 하다가 울산역이 이름만 그렇지 사실은 울산 도심에서 20~30분 정도 떨어진 언양 지역에 위치해 있어 고속버스를 택했다.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울산역에서 도심으로 오는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엇비슷해 보였다.
(참고로 옛 울산역은 지금은 이름이 태화강역으로 바뀌어 KTX를 제외한 기차들이 선다.)
고속버스를 예매하려다 우등고속 외에 'Premium Gold'라는 등급이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가격이 만원 정도가 비쌌다. 터미널 직원에게 물어보니 우등고속은 좌석이 28개, 'P.G'는 21개라 좌석 간격이 넓어 의자가 뒤로 젖혀지는 각도가 크다고 한다.
그냥 '프리미엄'이라고 하던가 '골드'라고만 해도 구별이 될 터인데 구태여 '두 가지를 합쳐서 썼다.
Delux도 Super를 붙이여 '슈퍼 디럭스'라고 하고 VIP에 V자를 하나 더 붙여 그냥 '매우'가 아니라 ' 매우 매우' 중요한 등급(V·VIP)을 만드는 게 세태인 듯하다. 상위 등급을 잘게 세분화하여 차별성과 우월감, 선민의식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상술일까? 그 끝은 어디일까? 이러다 '프리미엄 슈퍼 딜럭스 다이아몬드 골드' 등급이나 'V x 10'의 VIP도 나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물론 백수답게(?) 차상위 등급인 우등고속을 타는 것으로 만 원을 굳혔다.
40명 이상이 타던 일반고속은 없어진 것 같았다.
울산까지 책을 보다가 졸다가 창밖을 보다가 다시 책을 읽으며를 반복하며 갔다.
버스뿐만 아니라 울산으로 가는 경로도 바뀌었다.
경부고속도로만 타는 것이 아니고 의성을 지나는 상주영천고속도로를 경유했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버스전용차선 덕분인지 예전엔 5시간 걸리던 소요 시간이 4시간 10분으로 단축되었다.
울산고속터미널은 쇄락한 모습이 역력했다.
사람들이 빠르고 출도착 시간이 정확한 KTX에 몰리거나 자가용을 이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썰렁한 대합실에 승차권 판매 창구는 모두 문을 닫았고 무인발매기만 운영 중이었다.
서울에서 울산까지 이전과는 다른 많은 변화가 '백만 년' 만의 울산행이라는 걸 실감나게 했다.
토요일이라 길이 막힐까 봐 아침에 일찍 길을 나섰더니 울산에 도착해서도 결혼식까지 여유가 있었다. 자투리 시간에 북구청 옆 오토밸리복지센터에 있는 "울산노동역사관"에 가보기로 했다.
울산노동역사관은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울산지역 노동역사를 기억하고 역사 자료 보존과 정리를 위한 공간'이며 '특히 울산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2014년 2월 14일에 개관하였다.
상설 전시실에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는 글자가 박힌 커다란 사진과 백무산의 시 「전진하는 노동전사」가 붙어있었다. '너희는 조금씩 알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알고,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외치며 노래하던 그 시절을 대표하는 사진과 시였다.
자그마한 공간 속에 전시된 사진과 자료들을 돌아보다 두서없는 자문을 해보았다.
개인의 삶과 역사의 지형을 바꾸었던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전진하는 노동전사'들은 어떻게 걸어왔을까? 무엇을 세우고 무엇을 바꾸었을까? 신자유주의의 파고가 높은 지금은 어디를 또 어떻게 지나고 있는 것일까?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라는 새로운 '빗장'은 그들 '전진'과 어떻게 병행하고 있는 것일까?
기획 전시실에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태일, 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름이다. 지난 세월이 헛헛해지거나 '전진'이 멈칫거릴 때 저마다 선 자리를 그의 삶과 죽음에 비추어 보면 최소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
30여 년 전쯤 대학을 막 졸업한 젊은이들을 면접 볼 기회가 있었다. 누군가의 앞날을 내가 결정할 수도 있다는 은근한 부담감이 있던 첫 경험이었다. 나는 한 사람에게 비교우위의 점수를 주었고 입사 후 그는 나의 부서에 배치를 받았다. 나이와 직급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와 같이 축구회에서 뛰고 마라톤을 하고 두주불사의 술자리도 했다. 그의 결혼식은 물론 그의 첫 딸 돌잔치에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 딸이 자라서 결혼을 한다니······
갑자기 세월이 어느 부분인가를 훌쩍 건너뛰어 흐른 듯했다.
덕분에 옛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느새 그들도 세월에 밀려 은퇴 직전에 와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은퇴는 뭐가 들어있는지 알기 힘든 모호한 안갯속 같은, 조금은 뒤숭숭하고 두렵기도 한,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인 듯했다.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는 그들에게 나는 선배 백수로서 큰소리를 쳐주었다.
"야, 걱정하지 마. 백수는 니들이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환상의 세계야. 한 번 들어오면 아마 다시는 머슴살이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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