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편이 끓여주는 커피 한번 먹어 봤으면 좋겠다."
30대 중반쯤 되었을 때일까? 아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그래? 나가자. 맛난 커피로 사줄게"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아내가 원한 것은 인스탄트 커피라 단지 뜨거운 물을 끓여 붓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종류 불문 음식을 만들면 죽을병에 걸리는 줄 알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돌뱅이에게도 그런 '야만'의 시절이 있었다.
요즈음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들다 보면 문득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다.
"뭐 먹고 싶어?"
주말에 아내에게 묻는다. 묻기 전에 나는 이미 아내의 취향을 알고 있다.
"파전? 수제비?"
예상했던 대로 둘 다 오케이다.
쪽파로 만든 파전도 맛있지만 대파를 갈라 만든 파전은 또 다른 맛이다.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묽게 갠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바르듯 펼친다.
거기에 길이 네 쪽으로 가른 대파를 올리고 잘게 썬 오징어 뿌린다.
마지막으로 갠 달걀물을 올려주고 적당한 때 뒤집는다.
그리고 간장에 식초와 고춧가루, 맛술, 양파를 섞은 양념장에 찍어먹는다.
해물수제비는 멸치 육수에 감자,애호박, 양파, 당근 등속의 냉장고 속 야채를 넣어 끓어오르면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는다. 거기에 손질해둔 주꾸미와 새우를 넣어 데치듯 끓이고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면 된다.
두 가지 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음식들이다.
대단할 것 없는 이 간단한 일에 왜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인색했던 것일까?
본가와 처가의 겨레붙이, 그리고 나를 가장 잘 아는 딸아이까지 놀래키며 나는 몇 년 전부터 부엌에 서게 되었다. 식후에는 아내의 '한이 맺힌' 커피도 내리게 되었다. 그것도 인스탄트가 아니라 드립으로.
마침내 조금 철(?)이 든 것이다.
올해는 한 주에 한가지씩은 새로운 음식을 시도해 보는 목표를 세웠다. 아직은 순조롭다.
해볼 음식이 많다는 건 즐거움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라고 감히 말해보기도 한다.
아내는 격세지감을 느끼는 듯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누가 장돌뱅이의 이런 변모를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냐?'며 자주 웃는다.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 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 맛이 들었을까,
사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언제나 추운 겨울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그분이 독을 여는 그 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 할 그 김치.
- 오세영, 「겨울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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