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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귀성열차

by 장돌뱅이. 2024. 2. 9.

김환기, 「피난열차」 1951

80년대 나는 지방에서 근무하며 명절이면 서울로 올라오는 '역귀성'을 했다.
긴 시간을 이동하여 본가와 처가에 하룻밤씩을 자고 다시 같은 길을 내려와야 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다.
한 번은 일이 있어 명절에 서울로 오지 못한 적이 있었다. 저녁이 되자 대부분 고향으로 떠나 몇 집만 불이 켜진 텅 빈 지방 도시의 아파트 단지에는 적막함과 괴괴함이 가득했다. 귀성이 없는 3일의 휴가는 길고 여유로웠지만 동시에 우리 가족만 마치 절해고도에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고속도로에 길게 늘어선 차들과 붐비는 기차역 풍경을 연신 보여주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이런저런 짐을 꾸려 바쁘게 오르내리는 명절의 시간에 번거롭고 고단한 이상의, 그렇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위로와 신명 같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김환기의 그림은 전쟁통의 피난열차인데 긴박하거나 고생스럽기보다 올망졸망 정겹게 보인다.
마치 명절을 앞두고 고향으로 가는 6~70년대의 귀성열차 같다. 아래 시의 분위기처럼.

눈 위에 주름 귀 밑에 물사마귀

다들 한결같이 낯설지가 않다
아저씨 워데까지 가신대유
한강만 넘으면 초면끼리 주고받는
맥주보다 달빛에 먼저 취한다
그 저수지에서 불거지 참 많이 잡혔지유
찻간에 가득한 고향의 풀냄새
달빛에서는 귀뚜라미 울음도 들린다
아직 대목장이 제법 크게 슨대면서유
쫓기고 시달린 삶이 꼭 꿈결 같아
터진 손이 조금도 쓰리지 않고
감도 꽤 붉었겠지유 인제
이 하루의 행복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도 적지 않으리
여봐유 방앗간집 할머니 아니슈
돌려세우면 처음 보는 시골 늙은 아낙
선물 보따리가 달빛 속을 달려가고
너무 똑같아 실례했슈

모두들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낯선 데가 하나도 없는 귀성열차

-  신경림, 「귀성열차」-

이제 귀성의 풍경은 변했지만 일상을 멈추고 저마다의 길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이제나 같을 것이다. 아내와 나는 그 시절  늙으신 어머니처럼 고향으로(?) 오는 딸아이와 사위, 그리고 손자저하들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손님맞이 준비로 아침부터 즐겁게 부산을 떨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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