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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책『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by 장돌뱅이. 2024. 2. 12.

눈으로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따라가는 마음은 힘들었던 책.

어느 날 딸의 하얀 팔 위에 수많은 칼자국을 보게 된다. 딸아이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뭔가 잘못되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고 말한다. 딸은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 즉 조울증 진단을 받게 되고,  그 후 7년간 16번이나 보호병동에 입퇴원을 반복한다.
자식이 아플 때 그럴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은 것이 세상 부모의 마음 아니던가.

책은 그런 자식과 자식의 병을 이해하기 위해  엄마가 보낸 안간힘의 7년이 생생하게 적혀 있다.
둘 다 의사인 부모는 아이의 치료를 위해
연구와 통계자료를 뒤지고, 적절한 약을 찾고, 여러 가지 방법의 치료를 시도한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아이와 소통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이 책은 우리 가족의 고통의 기록이다. 우리가 겪은, 그리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고통을 우리와 같은 상황에 놓인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기록이다. 현대 의학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만족스러운 치유책이 없는  그래서 더한 편견과 낙인으로 괴로움을 겪는 정신질환 환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이것이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여느 신체 질환과 다를 바 없는 질환임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이 삶의 질곡에서 고통을 덜 수 있을지 그리고 가족 간에 서로를 외면하지 않고서 손잡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을 집필한 계기이다.

인간의 몸은 자연계 최고의 복잡계이다. 사람의 체세포 하나하나는 우주의 별과 같이 수많은 유전정보와 단백질 물질의 신호 전달에 맞춰 매 시각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누구도 그 신비의 체계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며 또한 체계의 이상인 질환의 이유 역시 알지 못한다. 유전만도 아니고 환경만 아닌, 특별한 계기나 잘못이 있어서만도 아닌, 구태여 이유를 말하자면, 누구도 맞닥뜨릴 수 있는 '잔인한 운명'이랄 수밖에 없는 정신 질환, 아니 뇌질환. 

정신질환의 범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으며, 정상과의 경계도 모호하다.

양극성 장애 환자의 증상도 환자마다 다 다르다. 조증이 심한 환자가 있는가 하면 삶을 잠식하는 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는 환자도 있다. 드물게 울증은 경미하고 생활에 지장이 없는 경조증 무드가 지속되는 사람들도 있다.

책은 정신질환과 연관된 유명인들 - 반고흐, 뭉크, 버지니아 울프, 헤밍웨이, 비비안  같은 - 의 사례를 들면서 질환의 증상에 대한 이해를 높인다.

우리 모두는 옹기장이의 손에 들려진 진흙과 같은 존재로, 어떤 옹기를 빚을지는 옹기장이 손에 달려 있다고 성경 예레미야 서에는 나와있지만 그게 현실에서는 위로도 대안도 될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아픈이들과 함께 공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책은 환자와 그 가족들만을 위한 안내와 경험담을 담고 있지 않다. 아픈 자식을 간호하며 매 순간 느꼈을 극한의 고통 끝에 얻은 깨달음은 그 아픔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절실한 삶의 지혜로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몸과 마음 어딘가가 아픈 '환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정상 가족, 정상 신체 등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정상성 신화에 사로잡혀 인생이라는 잔혹한 도박에서 지는 패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것으로 인생이 끝났다고 절망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원래 인생은 잔혹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는 패보다는 지는 패를 잡을 일이 훨씬 더 많다. 누군가가 항상 이기는 패만 잡는 것처럼 자랑을 일삼는 것을 보면 인생을 반도 모르는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속으로 비웃어도 된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인생은 지는 패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현실을 냉정하게 살피고 최악을 피하는 방법을 찾으며 인생의 층위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면 이기는 패를 잡는 것 못지않은 인생이 될 수 있다.

'부모 서바이벌 가이드' 역시 우리 모두에 해당되는 객관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1. 과도한 연민 대신 이해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아이는 여느 신체질환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아프게 된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하는 방식으로 증상을 표출한다. 그 결과 우리는 아픈 아이 앞에서 화부터 내게 된다.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긴 나쁜 병이 아니라 사람이 나쁜 것으로 되어버린다. 사태가 좋지 않을 때 환자가 한 말을 마음에 담지 않는다. 환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 들면 이상한 일이겠지만 환자에 대한 지나친 연민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음처럼 냉정하게 이성을 지켜야 환자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2. 나의 마음을 먼저 다스린다.
잘못한 것도 없이 터무니없는 인생의 짐을 진 것에 대해 화가 날 때가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다.
모성이 결코 절대적인 것도 무조건 적인 것도 아니다. 아이를 버리고 싶으면서도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심리다. 자책할 일이 아니다. 

고혈압, 당뇨병처럼 정신질환도 만성 질환에 속한다.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그로 인한 더 나쁜 결과를 약물의 도움을 받아 예방하고 관리하며 함께 살아가는 병이다. 현대 의료의 허풍과 과대 선전에 사로잡힌 우리들은 어떤 병이든 완치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만 인간의 몸에 깃드는 많은 병들 중 완치되는 병은 거의 없다. 이 사실을 명심하고 긴 호흡으로 장기전을 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환자와 그 가족들은 그들을 노리는 수많은 사기꾼들의 꼬임에 넘어가 무의미한 치료를 위해 엄청난 지출을 하고 경제적인 곤경에 처할 뿐 아니라 번아웃에 빠져 최악의 결과를 맞을 수 있다.

3. 돈 계산을 확실히 하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제까지나 가족이 재정적인 지원을 해줄 수는 없다는 점을 환자 자신도 인지하도록 하고 환자 스스로 자립해서 생활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환자가 적은 돈이라도 자신의 힘으로 벌어보는 것은 본인의 자긍심을 높이고 어엿한 사회의 성원으로 사는 데에도 매우 중요하다. 그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4. 가족을 지켜라
인생의 다양한 굴곡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고 싶어 한다. 누군가에게 그것을 투사함으로써 불행을 덜어보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나, 조금만 생각한다는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선의를 가지고 내린 결정은 종종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가족의 한 구성원이 가족의 질병이나 그 외의 잘못된 어떤 일의 원인을 꼬치꼬치 찾고 탓하기 시작한다면 지구상의 어느 가족도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부부의 관계는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한 사람이 주도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에 따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주도하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엄마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데 대한민국의 아빠들처럼 자식과의 소통에 서투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굳건히 존재하는 가부장제 상황에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와 함께 사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것임을 인정하고 서로 맞추는 도리밖에는 없는데, 질환을 가진 자녀가 부모의 요구 사항에 맞추기는 어렵다. 큰 문제가 아니라면 부모가 맞추어야 한다. 이 단순한 명제를 받아들이지 못해 오늘도 많은 정신질환 환자의 가족은 파탄을 맞는다.

5. 선을 긋기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과의 생활은 부단한 선 긋기의 삶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환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의 한계선, 내가 환자의 삶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경계선 등 수시로 수많은 임계선을 긋고 이를 지키느라 안간힘 써야 한다. 특히 가족들이 환자의 행도에 대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지는 항상 어려운 문제다.

6. 소중한 건 바로 지금, 여기
인간은 한시도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남는 건 '왜 지금 나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아?' 하는 분노와 원망뿐이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자유로운 존재이고 부모에게는 그 화살의 경로를 강제로 수정할 어떤 권리도 힘도 없다. 아이가 질병을 얻어 방황하거나 심지어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도 인간사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이가 준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따금씩 열어보는 보물상자로 간직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한 집착 역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주요한 이유이다. 미래에 대해 확실한 건 오직 한 가지, '나는 죽는다.'는 사실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확실한 사실을 밀쳐내고 죽음을 포함한 많은 불행을 피하는 일에만 몰두해서 미래를 설계한다. 결과는 무한한 불안과 조바심뿐이다.

하지만 걱정하고 비탄한들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죽은 후에도 자식이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힘닿는 데까지 돕는 것뿐이다. 에너지를 그러모아 정신질환자들의 권리와 복지 향상을 위한 사회운동을 펼치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치닫는 미래에 대한 걱정을 조금이라고 승화할 수 있는 방안이다.

내일 어떻게 무너지더라도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면 아이와 내가 함께 잘 산 인생이었다.

에르바르드 뭉크;석판화 버전 「절규」.

화가 에르바르드  뭉크는 지금으로 말하면 '공황장애' 같은 질환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뭉크는 널리 알려진
「절규」를 그린 배경을 이렇게 말했다.

"해 질 녘,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다리 난간으로 다가갔다. 친구들은 무심히 걸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그 순간, 자연을 관통하는 무한하고 강력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끌어안으며 공포와 고통의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내가 인생을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병처럼 내게 필요한 것이다. 불안과 질병이 없다면 나는 조타기 없는 배와 같을 것이다. 나의 고통은 나 자신과 나의 예술의 일부분이다. 그것은 나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이며 질병을 없애면 나의 예술도 없어진다. 나는 나의 고통을 계속 가지고 있고 싶다.

뭉크의 생각은 저자인 김현아가 꿈꾸는'소박한' 딸아이의 미래와 일치한다. 
그것을 위해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줄 뿐"이라고 했다.

부모로서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삶의 의미를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울까 하는 생각 외에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아이가 병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다독여가며 나의 병도 나의 삶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아이와 함께 찾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신체적 냉기 이상으로 사회적 냉기에 기인한다'(헨리 D. 소로).
사실 '정상'이란 오랫동안 사회가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거부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쓴 개념이며 유해한 허구에 불과하다.

정신질환자의 가족은 환자의 질환으로 인한 어려움과 함께 주변의 낙인과 편견에 다중으로 고통받는다. 한국사회는 정신질환의 문제를 전적으로 가족의 문제로 개인화하며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환자와 그 가족에게 다중의 낙인을 찍고 굴레를 씌워왔다. 하지만 정신적 고통의 급증을 가져오는 사회의 문제를 고찰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점점 나빠질 것이다.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변화 중 하나가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질환 환자에게 하는 '미쳤다'는 말을 '아프다'로 바꿔보도록 노력한다면 환자에 대한 낙인이 어느 정도 옅어질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질환'이라는 말 자체를 '뇌질환'으로 바꿔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실이 그러하고, 뇌도 엄연히 신체이므로 마치 여타 신체질환과는 달리 의지나 성격의 문제라는 편견을 만드는 말은 지양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이다.

사회적 냉기를 온기로 바꾸는 일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라 의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온기를 보태지는 못하더라도 편견과 냉기를 양산하지는 말아야겠다.


* 파란색은 책에서 인용부분임.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는 독서토론 영상 모임 <<동네북>>의 2월 선정 도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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