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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by 장돌뱅이. 2024. 2. 14.

*『사상계』 1960년 6월 "민중의 승리 기념호"(아래 모든 사진도 같은 책에서 인용)

이미 쓰레기 장에 던져버린  역사의 오물을 다시 뒤적거리는 이들이 있다.
마치 자신들의 뿌리라도 찾는 양 자못 진지하다.
터무니없이 진지해서 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웃을 수 없는 우리들에겐 결국 비극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들의 현재의 모습을 합리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홍범도를 치우는 자리에 들어서는 이승만.
해방된 조국에 친일파를 득세시켜 집권하고, 전쟁 중 피난처에서도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비열한 정치 파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양민 학살에 국민방위군으로 뽑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숨지게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부정선거를 획책하다 끝내 깡패들과 총탄의 야만에도 굴하지 않는 민중들의 저항에 쫓겨간 늙은 망령.  

오래전 대학로 근처 이승만의 숙소 이화장을 지나며 썼던 글을 다시 인용해 본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숙소, 이화장(梨花壯)>>

낙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대학로 쪽으로 잡았다. 중간에 이화장을 지나게 된다. 이화장은 이승만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 1947년부터 경무대로 가긴 전까지 머물던 숙소이다.
1948년 8월에는 우리나라 초대 내각이 이곳에서 조직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애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부르던 이승만 찬가를 아내와 나는 아직 기억한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하여
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이대통령 우리 대통령
우리는 길이길이 빛내오리다

「우리 대통령」이란 노래로 박목월 씨가 작사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행사에 참석하면 학생들이 합창하곤 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4.19를 기하여 없어졌다.
그러나 강도 높은 우상화교육의 여파 때문인지 60년대 후반까지는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불려졌다.

이승만은 1875년 몰락한 양반가문의 6대 독자로 태어나 13살 때부터 몇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20살 때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신문명에 접하기 시작했다. 1904년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하버드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세영의 글에 따르면(한겨레신문 1995년) “적어도 그는 1918년까지 반일 독립운동과 무관했다.”
1908년 3월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슨 격살 사건’ 때 법정 통역을 요청받은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죄를 범한 범죄자를 변호할 생각이 없으며, 내게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스티븐슨은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나 “일본의 한국지배는 한국에 유익하다.”, “한국에 이완용과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의 큰 행복이요, 동양의 다행이다” 등의 망언을 일삼던 인물이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1919년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서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총리호칭을 거부하므로, 임정에서는 대외적으로 임정이 둘이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임정조직을 대통령 중심제로 개편하여 이승만의 대통령 행세를 합법화했다."(송건호,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추대된 이후에도 이승만이 상하이에 머문 것은 겨우 6개월뿐이었다. 미국과는 다른 중국의 생활이 그에게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정은 거듭된 요청에도 상해로 복귀하지 않자 부득이 박은식을 대통령 대리로 선출했다. 이에 이승만은 임정에게 보내던 재미동포의 자금지원을 끊어버렸고 임정은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하였다.

그는 미주와 상하이 등에서 가는 곳마다 특유의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에 갈등을 조장하고 분열을 일으켰다. 『재미한인오십년사』를 쓴 김원용에 따르면 그는 어느 모임에서든 자기를 장으로 추대하지 않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 싸움들의 원인이 민족운동이나 단체 발전에 관한 정견 차이가 아니었고 이승만이 단체를 억압하며 재정과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심으로 일으킨 싸움”들이었다.

이승만에게 “독립운동이란 곧 미국의 동정과 지지를 얻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언제나 무관심과 냉대를 받을 뿐이었다.” 미국의 정보(문서)는 그를 독립운동가가 아닌 ‘목사’로 불렀고, ‘이승만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평가했다.

당시 독립운동의 방향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었다.
이승만식의 외교적 호소형, 안창호식의 실력양성을 통한 준비형, 그리고 이동휘, 신채호, 박용만 등이 주장한 무장투쟁론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하와이 ‘국민회’의 박용만을 야만적이라 비난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난하며 다시는 반복하지 말라고 김구에게 편지까지 보냈다.
독립운동에 어느 방법이 더 효과적이며 주체적이었던가 하는 문제는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겠다. 

이승만은 역사적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라기보다는 대통령에 대한 끊임없는 집념을 갖고 있는 '정략가'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도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본심과 노선을 정확히 파악한, 미국의 ‘한국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이세영의 글, 한겨레신문 1995  -

이러한 배경 하에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남북통일정부란 국민적 염원을 뒤로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초대대통령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기 위해 일제하 민족 반역자들의 처벌을 위한 국회 특별기구인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친일세력들과 손을 잡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장기집권을 꿈꾸며 부정선거를 저지르다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고 만다.

우리 현대사의 굴절과 파행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본군 장교 출신의 일급 ‘황국신민’인 박정희가 어떻게 해방 이후에도 군의 장군으로 남을 수 있었겠으며,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오르는 부끄러운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겠는가.

이화장의 대문 옆에 부착된 동판에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기념관”이라 쓰여 있다.
‘건국 대통령’?
그 표현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분단된 조국,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일 뿐이다.

복잡한 생각과 함께 이화장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밀어보니 굳게 닫혀 있다. 
원래 관람이 불가한 것인지 아내와 내가 간 날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 알아볼까 하다가 구태여 그렇게까지 보고 싶은 곳은 아니어서 우리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 폐기물에 겉포장만 둘러 다시 현실 정치 속에서 재활용 해보려는 '밑씻개'들에게 1960년 4.19혁명 바로 뒤에 쓴 김수영의 시를 들려주고 싶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없이
그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놈의 미소하는 사진을ㅡ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XX단체에서 ㅇㅇ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개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이었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너도 나도 누나도 언니도 어머니도
철수도 용식이도 미스터 강도 유중사도
강중령도 그놈의 속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무서워서 편리해서 살기 위해서
빨갱이라고 할까 보아 무서워서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리해서
가련한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신주처럼 모셔놓던 의젓한 얼굴의
그놈의 속을 창자밑까지도 다 알고는 있었으나
타성같이 습관같이
그저그저 쉬쉬하면서
할 말도 다 못 하고
기진맥진해서
그저그저 걸어만 두었던
흉악한 그놈의 사진을
오늘은 서슴지 않고 떼어놓아야 할 날이다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

군대란 군대에서 장학사의 집에서
관공리의 집에서 경찰의 집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군대의 위병실에서 사단장실에서 정훈감실에서
민주주의를 찾은 나라의 교육가들의 사무실에서
4·19 후의 경찰서에서 파출소에서
민중의 벗인 파출소에서
협잡을 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관공리의 집에서
역이란 역에서
아아 그놈의 사진을 떼어 없애야 한다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영숙아 기환아 천석아 준이야 만용아
프레지덴트 김 미스 리
정순이 박군 정식이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

우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다소곳이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면서
극악무도한 소름이 더덕더덕 끼치는
그놈의 사진일랑 소리없이
떼어 치우고ㅡ

- 김수영,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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