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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그림 그리기

by 장돌뱅이. 2024. 6. 27.

세상에는 은퇴를 한 백수를 위한 여러 팁들이 떠돈다. 
백세 시대에 남은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계획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듣는 순간에만 고개를 끄덕이곤 곧 잊어버리지만 한 가지만은 기억하려고 한다.
지금 가장 하기 쉬운, 가장 행복할 수 있고 나를 가장 풍요롭게 하는 어떤 일을 미루지 말고, 또 지속적으로 하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노년에 악기 리라를 배우기 시작했고 로마의 사상가 카토는 70세를 넘은 나이에 희랍어를 배웠다지 않던가.

은퇴 전 회사가 세워놓은 목표는 늘 버거운 것이었으므로 은퇴 후에는 거창할 필요 없는,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처럼 되도록 사소한 일을 찾았다. 아내와 함께 하는 산책이나 조용히 시를 읽는 일, 뜻밖에 접하게 된 그림놀이도 그렇다.

코로나로 갇힌 상황에서 손자저하와 놀거리를 다양하게 해보려고 신청했던 영상 색연필화 강좌가 시작이었다. 그림에 전혀 소질이나 취미는 물론 경험도 없던 터라 처음엔 커뮤니티 가입을 사양했으나 사소한 사연이 연결고리가 되어 뒤늦게 들게 되었다.

처음엔 색연필화로 시작했지만 어반스케치라는 걸 알게 되고 그걸 몇장 끄적거리다 그뒤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그려보게 되었다. 사진을 보고 그리기도 하고 (비교적 따라하기 쉬운) 이중섭의 아이들 그림을 흉내내 보기도 했다. 나 이외에는 평가할 사람이 없어 부담이 있을 리 없고, 잘 그리려는 욕심이나 기대치도 없으니 그림은 즐거운 놀이가 되었다.

나를 뺀 나머지 동호회 회원들의 실력이나 경력은 (내가 보기에는) 대단했다.
어떤 50+의 모임에 가도 있기 마련인 숨은 고수들은 그림 모임에도 있었다.
미술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왔다면서도 10분만에 엽서 두 장 크기의 어반스케치를 채색까지 끝내는 한 고수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내게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리고 싶은 특징만 그리라"라고 했다. 하지만 애초에 기본이 있을리 없는 내게 그 말은 마치 왼발 오른발을 교대로 빠지기 전에 부지런히 바꾸어 들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만화 속 무예 도사의 말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그외에 개인전을 포함한 수 차례의 전시회까지 한 회원도 있어 나는 '도대체 그런 분이 왜 이런 순수(?) 아마추어들을 위한 강의를 들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경력이 없는 다른 회원도 나와는 다른 수준의 그림을 그려냈다.

그런 고수들 덕분에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이번에 헝겊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보았다. 옷을 디자인하는 회원이 소개한 물감이었다.
수용성이라 수채화처럼 그리면 되지만 일단 마르고 나면 색이 빠지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그림만 그렸을 뿐이고 나머지 재단과 재봉, 내용물 채우기는 그 회원이 해주었다.
나는 그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불렀다.
있을리 없는 낙관도 하라고 해서 응급처치로 '장돌·곱단'을 그려넣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늙는다는 것은 몸의 이곳저곳이 기능을 잃어간다는 뜻이고 불편해진다는 뜻이다.
결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늙음이 온통 육체적 불편과 그에 따른 고통이 전부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각자가 노력할 때 모든 나이는 아름답고 그때그때가 삶의 절정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직은 붓 잡은 손이 어색하지만 내겐 그림그리는 일도 그런 삶을 가꾸는데 보탬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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