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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아이를 찾습니다

by 장돌뱅이. 2024. 7. 17.

김영하의 단편 소설 「아이를 찾습니다」는 소설집『오직 두 사람』에 들어있다.
텔레비전에서  같은 제목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었다기에 책을 읽고 난 뒤 OTT에서도 보았다.
드라마는 원작 소설의 각색없이 거의 똑같은 내용으로 시각화하였지만 내게는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느낌이 더 생생하고 절절하게 다가왔다.

평온한 휴일 오후.
젊은 아내와 남편의 꽁냥꽁냥한 대화, 그리고 두살박이 아들도 함께 끼어들어 나누는 시시콜콜한 일상과 행복. 그러나 잠깐, 정말 잠깐 사이에 마트에서 아이를 잃으면서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아이를 찾는다는 방송이 매장 안으로 벌써 세 번째 울려 퍼졌다. 반향은 없었다. 방목하는 양 떼처럼, 수백 대의 카트들이 매장 안을 평화롭게 소요하고 있었다. 미라는 그들  사이로 헤치고 들어가 소리치고 싶었다. 왜 아무도 방송을 듣지 않아요? 여러분도 아이가 있잖아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그날부터 부부는 아이를 찾는 일에 매달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단지를 만들어 돌렸다.
프로야구에 흥분할 수 있는 여유는 그들 부부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오직 아이를 찾는 일이 일상이고 소명이 되었다. 보금자리였던 아파트를 팔고 언덕배기 판잣집으로 이사를 한 후에도 부부는 아이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내가 조현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은 이 모든 불행이 아이를 잃은데서 시작되었으므로 아이만 찾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아이만 찾으면······

전단지를 본 사람들의 장난전화나 진심을 담은 제보전화에도 시달릴 만큼 시달리고, '이제 그만해도 될까?' 하며 스스로에게 물으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11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기적처럼 아이가 돌아왔다. 실종자 유전자 정보를 등록해 놓은 덕분이었다. 아이를 유괴해 간 여인이 자살을 하면서 유서를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아들의 귀환은  모든 것을 되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처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아들은 기억 속의 아이가 아니었다. 이름부터 성민이 아닌 종혁이었다. 얼굴도 성격도 달라져 있었다. 자신이 유괴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오히려 유괴범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히 학대를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남편은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해줄 수 있는 능력도 부족했다.
짜장면을 좋아하는지 피자를 좋아하는지 몰랐고, 컴퓨터와 침대도 마련해 줄 수 없었다.
"내가 유괴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하고 아버지는 허탈하고  괴로워했다.
(가족은 태어나는 것으로 완성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기억이 쌓여 형성되어 가는 기억공동체이기도 할 것이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내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아들의 성장 배경을 안 학교는 받기를 꺼려하는 눈치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아들은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걷잡을 수 없는 일들에 낙담한 남편이 탈출구로 죽음까지 생각할 무렵 갑자기 아내는 실족사로 세상을 떠난다.

어떠한 꿈도 꿀 수 없게 하는 잔인한 운명의 끝에서 남편은 아들과 함께 귀향을 결심한다. 
버려진 창고를 개조하고 폐광에서 버섯을 키우며 살지만 아들은 끝내 가출을 하고 만다.
'삶의 목적은 이미 사라졌고 의미 같은 건 원래 없었던 것 같은' 시간이 지속되던 어느 날  아들의 여자 친구가 찾아와 아들과 사이에 낳았다며 젖먹이 아이를 두고 간다. 자신은 키울 수 없는 사정이라고 했다. 남편은 마루 위에 놓여진 갓난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아이의 두 손을 잡는다.

작가는 이미 구상해 두었던 초고를 세월호 사건을 보고 다시 꺼내 이 소설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TV 화면 속 세월호 유가족들과 소설 속 부부가 감내해야 했던 상실의 아픔이 겹쳐보였다.
작가의 말대로 인생엔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 엄존하며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 남은 옵션이라는 건 오직 견뎌내는 일'뿐일 것이다.
갓난아이의 작고 여린 손을 잡는 아버지의 모습이  모진 세상과 집 나간 아들에 대한 희망을 끈을 아직 완전히 놓아버린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스럽고 뭉클했다. 더불어 그가 견디는 시간도 조금은 가벼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가져 보았다. 열 개만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반드시 열 개만큼의 기쁨이 필요한 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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